지난해에는 ‘방송·통신 융합’이란 단어를 유난히 많이 들었다. 디지털케이블방송과 위성DMB, 지상파DMB 등이 서비스를 개시했고 IPTV가 새 화두로 등장했다. 소비자로선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반면 사업자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게 됐다.
새해는 디지털방송이 본격화된다. 전국 지상파디지털방송이 가능할 뿐 아니라 지난해 기술과 시장환경에 대한 고심으로 디지털방송을 연기했던 주요 케이블TV사업자도 하나둘씩 본 방송을 시작한다. 특히 전 가구의 70% 이상이 케이블TV 플랫폼을 통해 방송을 시청하는 현실에서 케이블TV사업자의 디지털방송 본격화는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지난해 2월 국내 첫 디지털방송을 시작한 사업자의 최고경영자로서 ‘함께 시장을 연다’는 차원에서 다른 케이블TV사업자들이 디지털방송을 원활히 제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우선 많은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기술·서비스 개발비를 포함, 새 서비스에 뒤따르는 시행착오 등도 모두 비용으로 치러야 한다. 마케팅·고객지원 비용 등 직간접적인 변동비의 증가도 감내해야 한다. 어찌보면 선발사업자들은 산업 발전과 소비자의 디지털 삶을 위해 희생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비자로서도 디지털방송 전환은 쉽지 않다. 얼마 전 마케팅 직원들과 간담회를 했는데 ‘고객들이 디지털방송을 모르는데다 디지털방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업자나 정부가 그토록 주장하는 디지털방송을 소비자들은 왜 필요로 하지 않을까. 답은 간단하다. ‘아날로그방송과 비교해 가격이 비싼데다 채널수도 비슷한데 굳이 디지털방송을 봐야 하나’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아날로그 케이블TV 요금이 정상화돼야 한다. 소비자는 디지털 케이블방송과 아날로그방송을 비교하고 채널수 대비 비용이 저렴한 아날로그방송을 선택한다. 낮은 아날로그 가격 문제를 풀어야 한다. 아날로그의 낮은 가격은 사업자 간 경쟁과 인허가 기관의 복수 사업자 허가에서 기인했다. 현재 아날로그 케이블의 ARPU는 5000원 정도다. 통신비가 평균 4만원인 데 비하면 60여 채널의 서비스 가격으론 비정상적이다. 아날로그 가격이 높아져야 소비자들이 디지털로 옮겨갈 조건이 마련된다.
왜곡된 시장에선 양질의 콘텐츠가 자라나지 못함은 물론이고 유료방송시장 전체를 악순환의 고리로 몰아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지털산업 활성화를 위해 아날로그 시장의 정상화가 우선돼야 한다.
정부 차원의 콘텐츠 정책 지원이 중요하다. 디지털방송 전환에는 무엇보다 디지털방송용 콘텐츠가 필요하다. 이는 소수의 케이블TV 사업자만이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디지털방송 플랫폼에 필요한 것은 그에 걸맞은 콘텐츠다. 하지만 콘텐츠 사업자들의 활발한 선 투자가 어렵다. 콘텐츠의 문제는 콘텐츠 사업자들의 수익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에 디지털 독점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나 콘텐츠 사업자들에 일정기간 자금 등을 지원해야 한다.
기술 표준화도 시급하다. 최근 케이블TV의 지상파HD 방송 재전송을 놓고 기술 논란이 있었다. 결국 지상파 디지털변조방식(8VSB)을 케이블 디지털변조방식(QAM)으로 재변조하지 않고 그대로 전송하기로 했으나 해결해야 할 기술적인 이슈가 산적해 있다. 또 데이터방송도 위성방송·지상파방송·디지털케이블방송이 양방향 데이터방송의 표준 규격 미들웨어를 다르게 가져간다. 끊임없는 논란이 예상된다. 디지털방송산업 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소비자들에게도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기술표준화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디지털방송 구축의 효율화 측면은 물론이고 소비자의 경제성 측면에서도 필요한 선결과제다.
케이블TV사업자의 자금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모든 기간사업은 초기 부담이 크다. 아날로그방송 대비 디지털방송의 변동비가 높은 것은 초기 막대한 투자비도 있지만 콘텐츠 측면에서 특별한 차별성을 가지지 못한 채 무리한 마케팅을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광고선전비·판촉비·교육비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디지털방송 전환 비즈니스는 득이 아니라 손실로 연결된다. 당연히 케이블TV사업자는 적극적이기 힘들다. 셋톱박스 지원이나 단계별 PP수수료율 적용 등도 필요하다. 새해엔 정부와 방송사가 힘을 합친 디지털방송 전면전으로, 소비자를 배려하는 디지털 해가 되길 바란다.
◆이관훈 CJ케이블넷 대표 khl@cj.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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