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제2의 강병제를 기대한다

 다국적 기업 CEO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엘리트 회사에 근무한다는 자부심도 예전같지 않고 신나는 일도 별로 없는 눈치다.

 “요즘은 본사 회의에 가면 속이 터질 때가 많아요. 자존심도 상하고요. 중요한 건 이러다가 중국과 인도에 완전히 밀리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됩니다.”(유력 다국적 기업 M사의 R사장)

 미국 본사에 가면 한국은 이젠 ‘찬밥’이다. 온통 중국과 인도 얘기뿐이다.

 관심이 이 두 나라로 쏠린다는 것은 대부분의 본사 지원이 이들 지역으로 몰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언제부터인가 세계시장에서 1% 정도의 매출을 올려주는 평범한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는 폭발적인 성장력으로 특수성을 인정받던 ‘강병제·정형문 시대’의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권한도 대폭 줄었다. 그물식 매트릭스 조직이란 미명하에 인사권과 돈줄인 재경업무가 아태지역 매니저들에게 속해 있다. 한국의 지사장은 그저 관리자로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마디로 지사장 개인의 색깔을 갖고 일하기 힘든 구조가 돼 버린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웬만한 지역의 사정은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데다 지사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만한 사안이 별로 없다는 게 이유다.

 한국시장이 포화상태에 달하면서 겪는 냉대다.

 국내에서 겪는 설움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남의 나라 물건을 팔아주는 사람’이란 인식이 팽배하다. 뿌리깊은 ‘배타적 국민정서’는 항상 넘어서기 힘든 벽이다. 다국적 기업 CEO 중 이렇다 할 협·단체장을 맡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도 이 같은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국적 기업도 삼성전자와 같은 똑같은 IT기업으로 봐 달라. 그만큼 고용·세금 모든 게 똑같다. 자꾸 다국적 기업 운운하며 국내 기업과 구분하는 건 맞지 않다.”(다국적 기업 O사의 P사장)

 실제로 대다수 다국적 기업은 국내 어느 기업 못지않게 많은 세금을 낸다. 고용 창출 효과도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막대하다. 수출전선에서의 활약상도 눈부시다. 한국IBM과 한국HP의 경우 이미 10여년 전에 각각 5억달러와 1억달러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도 수백개의 국내 협력업체로부터 제품을 구매중이다. 한국IBM은 전직 출신만도 4000명을 넘는다. 이들이 곳곳에서 우리 IT산업의 ‘사관생도’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우리 IT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그들은 분명 기여했다. 척박한 우리 토양에 처음 IT기술을 소개하고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며 끊임없이 국내업체에 자극을 준 것도 그들이다. R&D센터를 세우고 인력을 늘려 본사의 많은 리소스를 한국에 들여온 그들의 노력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앞으로도 그들이 없으면 우린 절름발이 발전을 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각종 원천기술과 선진응용기술이 경쟁국인 중국과 인도에 먼저 들어가서는 우리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다.

 “우리가 좀더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시장이 아직도 유비쿼터스 등 선진기술 분야에서 테스트베드로 특수성이 높고 투자가치 역시 뛰어나다는 것을 부단히 알려서 제 밥그릇을 찾아 먹어야 합니다.”(다국적 기업 I사의 L사장)

 지금은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때다. 이 어려운 시기에 중국과 인도에 밀리지 않고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줄 때다. 그럴 때만 단순히 본사의 매출을 돕는 ‘도우미’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제2의 강병제’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김경묵 부국장@전자신문, k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