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지금은 소비자주권시대

한국의 IT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사례를 여럿 가지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사례가 한국이 IT강국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노키아, 모토로라 등 세계 최고의 휴대폰업체들이 한국 휴대폰 시장에서 맥을 못 추고, 들고나기를 거듭하고 있다. 세계 휴대폰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두 회사의 처지에서 보면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계 PC시장에서 통신판매로 새로운 마케팅신화를 남겼던 델도 마찬가지다. 한국시장이 세계시장과 무엇이 다르겠냐고 호언장담했던 델의 시장점유율은 아직도 5% 수준이다. 세계 제1의 SW기업인 MS는 한국시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세계 사무용SW시장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한국시장에서는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싸게 사무용SW를 판매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은 MS의 입지를 짐작게 한다. 소니와 올림푸스, 파나소닉 등 세계 가전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일본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똑같다. 세계 시장에서는 일류로 대접받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우선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국산 제품이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가전제품에서 컴퓨터·SW, 통신기기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제품들보다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한 국산제품이 있다는 것은 외국 기업들에는 딜레마다. 여기에 2002월드컵에서 보여준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은 합리적인 구매를 기대하는 외국 기업들의 생각을 순진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고 이들 세계적인 전자·IT기업이 한국시장에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국법인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전개해온 결과라는 점에서 충격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세계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 대대적으로 가격공세를 펼치고 있다. 한국시장에서 한 번 해보자는 기 싸움으로 해석된다. 도저히 시장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장이지만, 한국시장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최첨단 시장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한국시장에서의 성공이 세계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보증수표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홀대할 수 없는 시장이라는 얘기다. 어차피 그동안 전 세계 시장에서 전가의 보도로 여겨져온 브랜드마케팅이 전혀 먹히지 않는 한국시장에서 이제는 마지막 마케팅 수단인 가격으로 승부를 하겠다는 게 가격공세의 배경인 셈이다. 이미 일본산 LCD TV 등은 국산 가격수준이거나 오히려 낮아졌으며, 그동안 유아독존 식으로 사업을 전개해 오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일부 외국 패키지 SW업체들까지 대대적으로 가격을 인하하면서 한국의 소비자를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부 패키지 SW는 전 세계에서 한국의 소비자들이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문제는 가격공세를 펼치고 있는 외국 기업이 아니다. 이들 기업의 대대적인 공세에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한국의 소비자들을 세계 최고로 인정하면서 대대적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다면, 언제까지 국내 소비자들이 이를 외면할 정도로 우직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국내 수준에 접근한 중국 기업들도 틈새시장에서 이제는 주력시장을 넘보고 있다. 한국시장보다는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한 전문업체 사장의 토로는 한국시장이 세계 어느 시장보다도 격렬하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우리 기업들은 어떻게 넛 크래커(nut cracker)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소비자 주권을 실감케 하는 요즘이다.

◆양승욱 디지털산업부장 sw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