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기자는 도쿄에서 시속 300㎞인 신칸센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교토부 히카리다이에 있는 ‘게이하나 과학도시’ 내 국제전기통신기초기술연구소(ATR)를 찾았다. ATR는 일본 기간통신사업자인 NTT 산하의 민간 연구소. 이 ‘게이하나 과학도시’에는 20여개 연구소가 입주해 있으며 배후 도시나 일반 상가가 거의 조성돼 있지 않은 전형적인 연구중심의 단지였다. 호소노역에서 택시로 20여분 만에 도착한 ATR는 지리적인 분위기가 우리나라 오창 산업단지 내 들어서 있는 생명공학연구원의 제2 캠퍼스를 연상케 한다.
지난 89년 게이하나 과학도시에 둥지를 틀고 로봇연구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ATR의 로봇연구는 지능화 기초연구에 기반을 둔 커뮤니케이션 로봇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 혼다의 이족보행로봇 아시모가 기계적인 성격이 강하고, 소니의 로봇이 디자인과 지능화에 치중하고 있다면 ATR의 로봇 연구 방향은 대형 로봇은 소프트웨어적인 측면, 소형 로봇은 기계적인 측면에서 강점을 보인다.
◇만만찮은 로봇지원=ATR는 14개 부문(8개 연구센터)에 총 390명이 근무하고 있는 출연연 성격이 가미된 민간 연구소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인력이 5년 전후의 ‘직무경력’을 쌓기 위한 ‘캐리어 패스’로 거쳐가는 곳 정도로 인식하는 운용시스템이 독특하다.
연구소는 일본정부와 NTT, KTT, 도시바 등 산업계가 공동으로 7대 3의 지분 형태로 투자됐기 때문에 오히려 공기업 성격의 연구소에 가깝다.
로봇 분야에는 ATR 전체 예산 50억엔(500억원)의 10% 가량인 5억엔(50억원) 정도를 투입, 바퀴로 굴러가는 대형 로봇과 이족보행 소형 로봇에 대한 연구 및 제작을 하고 있다.
ATR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전체 인력 390명 가운데 연구인력이 329명이며, 이들의 20%인 68명이 유럽이나 미국, 아시아 등지의 외국인 출신이라는 점이다.
ATR에서 ‘지능형 로봇 및 통신실험실’과 ‘미디어 정보과학 실험실’ 등 2개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하기타 노리히로 센터장은 “연구 인력의 4분의 1이 히타치, 도시바 등 30개 기업에서 파견된 연구원들로 채워져 있다”며 “글로벌 정신에 맞는 인력을 양성·배출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봇연구 아이디어로 승부=이곳에서 제작된 대표적인 로봇은 바퀴로 이동하며 농담과 슬랩스틱 코미디가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형로봇 ‘로보비(Robovie)-R’와 이족보행 및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한 소형로봇 ‘로보비-M’ 시리즈 등 2종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89년부터 본격화된 ATR의 로봇 연구는 일상생활을 환경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장난감 타입의 로봇 제작에 기술개발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 ‘로보비’ 시리즈가 원활한 제스처나 친구처럼 대화가 가능한 친인간형으로 개발되고 있는 이유다.
ATR 로봇 실험실에서는 ‘로보비-4’ 버전 개발이 한창이다. 일본 아이치 엑스포에서도 프로토 타입으로 선보인 바 있는 ‘로보비-4’는 로봇 겉 표면의 감촉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연노랑 실리콘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해 보인다.
어린이들에게 좋은 감촉을 주기 위해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이 실리콘이었다고 ATR 연구진은 설명한다.
둘러본 몇 곳의 실험실에서는 연구원들이 3∼4명씩 짝을 이뤄 겉에 연노랑 실리콘을 입힌 ‘로보비-4’를 대상으로 제스처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프로그래밍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로봇 부문의 선임 연구원인 미야시타 다카히로 박사는 “로봇연구는 누구에게나 처음 시도되는 일이어서 반짝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명”이라며 “로봇의 표면 감촉을 부드럽게 한답시고 로보비 전체에 실리콘을 입혔는데 로봇에서 발생하는 내부 열로 인해 시스템 전체가 녹아 내린 일도 있다”고 말했다.
◇기술전반 다소 앞서=ATR는 지금까지 두 종류의 로보비를 유통업체인 ‘브이스톤’을 통해 220여대를 판매하는 등 기술 상용화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기술 개발이 한창인 우리나라보다는 다소 앞서 간다고 판단되는 부분이다.
특히 일본의 이족 보행 로봇의 경우는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서기도 하고, 물구나무 서는 동작을 자연스레 연출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로봇들의 서툰 기계적인 움직임이나 균형감각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다만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의 기술 수준은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로봇이 태그가 달린 물체의 위치 파악시 10∼15초 정도 소요되고 사용되는 특수 카메라 성능 인식 능력 등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ATR 취재를 위해 함께 방문한 ETRI 이재연 박사는 “이는 자체 개발보다는 이미 나와 있는 기술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로봇 상호 간의 위치를 파악하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의 경우는 오히려 IT강국으로서 통신기술이 뛰어난 우리나라와 유사한 수준으로 파악됐다. 우리나라 로봇 연구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고 강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이는 부분이다.
이재연 박사는 “상품화한 로봇의 기술 수준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으나 기업들이 공급하는 부품 제조 수준이나 디자인에서 우리가 밀리고 있는 것 같다”며 “로봇 연구 기간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길어 인프라가 잘 축적되어 있으며 우리보다 3∼4년 정도 앞섰지만 따라잡을 수 있을 것같다”고 평가했다.
◆인터뷰-하기타 노리히 ATR센터장
“연구원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ATR가 직접 투자를 하고 있지만 창업자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닙니다.”
ATR에서 ‘지능형 로봇 및 통신 실험실’과 ‘미디어 정보과학 실험실’ 등 2개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하기타 노리히로 센터장은 “지금까지 2개 업체가 창업했다”며 “지난해엔 ATR가 직접, 벤처창업을 지원하는 자회사 성격의 프로모션 업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기술 상용화 문제는 어느 연구소든 안고 있는 고민일 것입니다. ‘로보비’의 경우도 10명의 연구원이 모여 고민하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리히로 센터장은 운용체제에 대해선 “연구원이 직업 안정성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연구원을 받아들이고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며 “그렇다고 연구의 연속성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고 본다”고 설명한다.
“ATR는 이미 많은 기술이 시스템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데다 한국처럼 벤처기업에 연구원들이 직접 투자하기 보다는 기관 투자 쪽으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노리히로 센터장은 “최근엔 벤처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모션 자회사를 설립,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ATR는 연구성과중심제(PBS)가 도입되어 있지만 대부분 정부로부터 발주를 받아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개 4∼5년 정도 연구하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지만 연구원 재직중에는 안정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노리히로 센터장은 “ATR의 경우 연구소의 기술력 비교에서 미국의 미시간대학에 이어 세계 4위권에 올라있다”며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ATR를 경력을 쌓아가는 코스, 즉 ‘캐리어 패스’로 인식하고 있지만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이유는 실적을 쌓지 못하면 대학교수 등으로 이직할 때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직 연구원 중 우수 인력은 대학으로 가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ATR와 이들 교수간 네트워크가 형성돼 향후 우수한 대학인력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증가해 서로 윈-윈하는 셈입니다.”
노리히로 센터장은 외국인력이 20% 이상을 차지하는 데 대해 “국제 협력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부분”이라며 “그들이 언젠가는 일본 마니아가 될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보비 시리즈
ATR는 이미 휴머노이드인 로보비시리즈를 판매한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연구소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유통업체인 ‘브이스톤’을 통해 판매한 로봇은 대략 220여대에 이른다.
키가 110㎝인 ‘로보비 R-2’는 20여대가 대당 500만엔(5000만원)에 팔려 나갔다. 이보다 작은 30㎝ 크기의 ‘로보비-M’의 경우는 200여대가 개당 30만엔(300만원)씩에 보급됐다.
‘로보비-M’은 일반 소비자의 경우 대부분 장난감 개념으로 구입해 가고 있다. 최근 열린 아이치 엑스포 박람회에서는 이들 로봇이 일본의 어린이들에게 폭발적 관심을 끌었다.
서로 인사를 받아주거나 로봇을 만졌을 때의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친구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 ATR 연구진의 설명이다.
‘로보비 R-2’에는 카메라 4대가 장착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2대는 사람의 눈 역할을 하고 나머지 2대는 주위사물과의 거리측정 등에 이용되는 적외선 카메라다.
특히 ‘로보비 R-2’와 ‘로보비-M’의 경우 블루투스 기반으로 제작되어 상호 통신까지 가능하다.
실제로 연구진은 110㎝ 키의 ‘로보비 R-2’가 주위에 흩어져 있는 300×300㎜ 크기의 주사위를 3개까지 쌓은 뒤 더 높이 쌓기 위해서 로보비M과 교신해 협력하는 모습을 소개했다.
로보비R-2는 90㎝ 높이로 쌓은 대형 주사위를 더 높이 쌓기 위해 30㎝ 키의 ‘로보비-M’와 통신해 오게 한 뒤 주사위를 들게 하고 이어 자신이 로보비M을 번쩍들어 주사위 한 개를 더 쌓도록 했다.
카메라 센서의 경우는 초당 400프레임을 받아 위치 정보를 처리한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서 연구진은 팔의 축을 4개로 설계했다. 또 목의 움직임을 원활히 하기 위해 목 축도 3개나 설치, 상하좌우 움직임이 가능하다.
이와 함께 로보비-M’의 경우는 스스로 테니스 공을 껴안거나 발로 차고, 넘어질 경우 텀블링을 통해 일어설 수 있는 수준이다. 특히 완벽에 가까운 동작으로 선보이는 물구나무서기야말로 로보비-M의 압권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ATR는 현재 상용화를 전제로 한 애니멀 타입의 센서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유비쿼터스화된 로봇 개발에 나서고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가족 같은’ 로봇 개발에 치중할 계획이다.
미야시타 다카히로 박사는 “처음 로봇을 연구할 땐 막연한 개념 밖에 없었다”며 “아이들이 일을 하지 않지만 부모가 애착을 가지고 양육하듯 로봇에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부여한다면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 대화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대 300개의 센서를 장착하고 확률 로드맵을 심었을 땐 로봇 스스로 마치 인기척을 느끼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도 있다”며 “현재는 40㎏이나 나가는 로봇의 무게를 줄이는 일이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히카리다이(일본 교토)=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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