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과거 도청(盜聽) 사실은 올 여름을 뜨겁게 달궜다. 도청은 남의 이야기, 회의 내용, 전화통화 따위를 몰래 엿듣거나 녹음하는 일로 사전에 정의돼 있다. 그 자체가 불법행위다.
도청은 수년 주기로 정치권에서 빈번하게 등장해온 단골 이슈였다. 당시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흘려들었지만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반신반의했던 국가기관의 도청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국민의 불안감은 증폭됐다. ‘도청 신드롬’이 만들어질 정도다.
도청이 이뤄지던 음식점 이름이 거론되면 도청 대상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까지도 과거 그 음식점을 이용한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게 된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선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등의 상담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기업 회의 방식이 필답형식으로 바뀌는가 하면 핵심 임원들의 유선전화가 비화(秘話)용 전화기로 바뀌는 등의 백태를 낳고 있다.
추세를 반영하듯 도청방지용 제품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도청감지기나 도청차단 영상전화기 등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유선전화의 도청을 방지해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국민 불안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다.
1974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만든 ‘도청(The Conversation)’이란 영화는 도청으로 인해 무기력해진 현대인의 불안과 강박증을 제대로 묘사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을 실각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고 2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당시에 만연한 정치에 대한 불신과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효과적으로 그렸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는 도청 신드롬이 국민 전체에 번져 사회분위기를 해치는 심각한 강박관념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부끄럽다고 덮어두려 할 게 아니라 과거 도청사실과 방법을 낱낱이 공개하고 완벽한 재발방지책을 서둘러 내놓아야만 국민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1988년 8월 4일 목요일밤 뉴스데스크 생방송중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뉴스보도룸에 한 사내가 뛰어들어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고 외쳤던 사건이다. 뜬금없이 그때가 떠오르며 쓴웃음을 짓게 되는 건 왜일까.
IT산업부·최정훈차장@전자신문, jh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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