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금요일 저녁, 주말을 앞둔 일본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도쿄 시부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시부야역에서 내리는 플랫폼에서 부터 개찰구로 향하는 기둥까지 온통 게임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역전체를 도배해 버렸기 때문이다. 답답한 역사를 벗어나도 눈을 사로잡히기는 매한가지.
일본 젊은이들의 패션을 주도하는 최고 상가인 109쇼핑센터 외벽에는 대형 광고 플래카드가 걸리고, 길거리 대형전광판에도 어김없이 게임을 홍보하는 동영상이 흐리고 있다. 도로에는 미녀 도우미까지 나서 선전 공세를 펼치니 이쯤되면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시선을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눈을 들어 광고를 쳐다보면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소니, 닌텐도, 세가, 남코 등 일본 유수의 게임업체들을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광고가 NHN재팬의 ‘한게임’ 광고였기 때문이다.
게임의 본고장 일본 본토를 향한 국산 온라인 게임의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NHN재팬은 지난 1일 저녁부터 도쿄 심장부 시부야에서 일본 최고의 인기 가수 나가세 도모야를 모델로 내세워 ‘한게임’을 알리기 위한 대규모 프로모션을 진행해 일본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주 앞서부터는 TV CF를 제작해 전국방송에 대대적으로 방영했다.
일본인을 놀라게 만든 것은 NHN재팬 뿐만이 아니다. 넥슨재팬은 지난달 26일부터 일본 최대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에서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를 알기 위한 대대적 이벤트를 펼쳐 주목을 받았다. 아키하바라역 플랫폼의 대형 광고에서부터 지하철 내 각종 광고판을 ‘마비노기’의 대표 캐릭터인 ‘나오’가 점령한 것.
역을 벗어나서도 8등신 미녀 도우미 50여명이 ‘나오’ ‘서큐버스’로 분장해 상냥한 목소리로 ‘마비노기’ 초대장을 건네주는 등 ‘마비노기’라는 이름을 일본인들 가슴에 깊게 새겨 넣었다. 아키바하라의 한 메이드 카페도 ‘마비노기’ 관련 상품이 점령했다. 이곳에서 오므라이스 같은 음식을 시키면 케찹을 이용해 ‘마비노기’의 개발팀 데스캣을 상징하는 고양이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일본은 게임에 관한 한 우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지로 여겨졌다. 일본은 소니와 닌텐도 등 세계적 게임업체를 중심으로 수십 년 동안 콘솔게임과 아케이드 게임이 장악해왔다. 물론 이들 게임은 국내로 유입돼 우리나라에 게임시장을 만들고 아마추어 개발자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이런 게임왕국 일본에서 한국 온라인게임이 도심을 점령했다는 것은 단순한 프로모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에게 게임을 전수한 땅에 역으로 우리 게임을 선보여 인기를 얻는다는 점에서 국산게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최근 일본에서 활동하는 국내 게임업체 중 가장 활약이 두드러진 곳은 단연 NHN재팬이다. 최근 NHN 재팬의 경영 성적표는 가히 눈부실 정도다. 이 회사는 지난해 246억원의 매출액에 35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성장 속도는 한층 폭발적이다. 지난해 1월까지 NHN 재팬 한게임(www.hangame.co.jp)의 회원수는 438만명에 불과했지만 12월에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동시접속자수도 지난해 10월 10만명을 넘어섰다. 경쟁사이트로 거론되는 일본 야후게임의 동접자가 2∼3만명 수준이니 ‘한게임’이 일본 내 NO.1 게임 포털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HN재팬은 올해 매출 목표를 600억원으로 잡고 공세의 고삐를 한층 당길 계획이다. 이를 위해 최근 일본 현지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인력을 모집하고 있다. 각 분야별로 채용 중인 인원수는 200여명 수준. 창립 5년째를 맞는 현재 인원이 150명선임을 감안하면 투자 규모가 얼마나 큰 지 실감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2~3년 이내에 NHN 재팬을 일본 주식시장에도 상장시킨다는 계획이다.
NHN재팬의 천양현 사장은 “일본은 한국보다 늦게 브로드밴드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브로드밴드 이용자 수를 추월했고, 일본의 온라인 게임시장도 매년 급성장하는 등 시장 성장 속도와 규모 면에서 한국에 버금가는 큰 시장으로 부상했다”며 “올해 목표는 NO.1 게임포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해 일본인들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서비스와 기업으로 자리잡는 것”이라고 말했다.NHN재팬이 게임포털 분야에서 일본 NO.1의 입지를 구축했다면 MMORPG 분야에서는 ‘라그나로크’가 맹활약하고 있다. 이미 국내 언론을 통해 활약상이 소개돼 익히 잘 알려졌지만 현지에서 체감하는 ‘라그’ 열풍의 수위는 한층 뜨거웠다.
일본 겅호가 서비스하는 ‘라그나로크’는 지난해 6월 일본 동시접속자 수 10만명을 돌파하며 일본에 처음으로 MMORPG 마니아를 만들어 냈다. ‘라그나로크’ 캐릭터 축제인 ‘라그페스티벌’ 행사에는 3만여명이 몰려 인기를 실감케 했다. ‘라그나로크’ 동인지와 화보집은 일본 게임 점포의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캐릭터 상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등 ‘원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 전략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일본 TV도쿄는 26화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방영했고 라디오 프로그램도 만들어질 정도. ‘라그나로크’를 서비스한 겅호가 이를 기반으로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한 것만 보아도 ‘라그나로크’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국산 온라인 게임의 돌풍은 일본 현지를 돌아다니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키하바라, 기노쿠니야 등 일본의 대형 서점의 게임 코너에는 ‘메이플스토리 공략집’ ‘리니지 2 완벽 공략집’ ‘씰온라인 공략집’ 등 국산 온라인게임 서적들이 즐비하다. ‘Login’ ‘패미통’ ‘도리마가’ ‘NET GAME WORLD’ 등 유슈의 일본 게임 전문지 표지를 장식하는 것도 대다수 우리 게임이 캐릭터들이다.
NHN재팬에 이어 국내 지사로 활약이 두드러진 곳은 ‘메이플스토리’를 서비스하는 넥슨이다. 넥슨 재팬은 지난해 111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해 전년 대비 500%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최근 ‘마비노기’를 론칭하는 등 올해는 신규 라인업을 대폭 강화하고 게임포털 공략에도 적극 나서 400억원대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데이비드 리 사장은 “넥슨이 지난해 500% 성장을 기록했고, 겅호도 약 두 배 정도 성장했다고 발표하는 등 일본 온라인 게임 시장의 발전 속도는 대단히 빠르다”며 “브로드밴드 망의 보급과 함께 관련 콘텐츠 수요가 늘고 있는 만큼 넥슨 게임을 일본인들에게 적극 알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1년 소프트뱅크와 합작법인 ‘엔씨 재팬’을 설립한 엔씨소프트도 ‘리니지’ 고정팬을 대폭 늘려가며 일본 내 입지를 넓혀나가고 있다. 지난해 6월 상용서비스에 들어간 ‘리니지2’는 현재 4만명대의 동시접속자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앞서 서비스한 ‘리니지’도 1만7000명의 동접자를 기록 중이다.
이밖에 써니YNK재팬도 지난해 4월 정식 서비스에 들어간 ‘씰온라인’이 꾸준한 인기를 모으자 이달부터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NTT 도코모를 통해 3D 모바일 게임 ‘seal 모바일 i’의 서비스에 들어가는 등 한류 바람몰이를 이어가고 있다.
써니YNK의 박기원 지사장은 “최근 일본은 한국이 3∼4년전 온라인 게임이 급성장했던 시기와 비슷한 국면을 맞고 있다”며 “올해부터는 일본 게임사들도 대거 온라인 게임을 내놓을 예정이어서 시장이 더욱 확대되고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도쿄=김태훈기자 김태훈기자@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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