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학창시절. 모든 교과서 중에서 가장 허름했던 책은 국어, 영어, 수학 교과서가 아니었다. 갖고 있던 모든 책들 중에서 보고 또 보고 그래서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급기야는 페이지가 분리되기 시작해 다시 제본을 해야 했던 교과서는 바로 사회과부도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였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한 편의 게임 때문이었다. 전 세계를 항해하며 교역을 벌이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사랑과 야망, 생존에 대한 고찰, 바로 ‘대항해시대 2’라는 게임이 그 주인공이다.
교과서로 만들어졌던 사회과부도는 나의 해도이자 미지의 지역에 용감히 뛰어들 수 있는 길잡이였고, 만약 책이었다면 분명 함께 너덜너덜해졌을 만큼 수 많은 시간을 플레이했던 ‘대항해시대 2’와 함께 나의 머릿속에 흡수됐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교과서 중에서 나도 모르게 달달 외워진 유일한 교과서였고 이런 증상은 필자뿐만 아니라 이 게임을 같이 플레이했던 몇몇 친구들에게 확산돼 갔다.역사 시뮬레이션 ‘삼국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게임 개발사 ‘코에이(光榮)’는 지독히 한 우물만 파는 곳이다. 일본의 역사를 다룬 ‘노부나가의 야망’,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지’ 등의 시리즈로 시작된 회사로, 첫 작품이 발매된 이래 지금까지 회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타이틀이 앞서 말한 두 작품이다.
역사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에 온 열정을 바치는 보기 드문 제작사다. 한 장르에 대해 끝없이 몰두하는 모습은 ‘코에이의 게임은 어느 정도의 완성도는 보장한다’는 게이머들의 인정을 받게 했고, 그 결과 폭발적인 인기보다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스테디셀러로 빛을 발했다.
이런 가운데 조용히 발매되기 시작한 것이 ‘리코에이션’ 시리즈다. 기존 코에이의 역사 시뮬레이션 시리즈는 심사숙고하면서 직접 나라를 키워 나가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등 정적인 느낌의 게임이다.
덕분에 모든 유저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래서 코에이에 익숙하지 못한 유저에게 리코에이션 시리즈가 관심을 모았다. 그들의 전공인 역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RPG 요소를 첨가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 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었는데 ‘대항해시대’가 대표적인 작품이다.코에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에리카와 요이치. 그는 게임을 제작할 때 시부사와 코우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재미있는 크리에이터다. 원래 염료 도매상이었고 취미로 시작했던 프로그래밍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성인의 감성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고형 게임을 만들어보려 했던 그의 노력이 코에이를 역사 시뮬레이션에 특화된 회사로 만들게 된 것이다. 자신도 역사를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
또 그는 활발한 의논과 새로운 발상을 중시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즐겁게 ‘역사’를 즐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가 리코에이션 시리즈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고민은 성공했고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비롯한 ‘삼국지 영걸전’, ‘태합입지전’ 등의 많은 작품이 성공을 거뒀다.
‘대항해시대’는 뛰어난 프로듀서 후쿠자와 에이지라가 버티고 있지만 에리카와 요이치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의 이름은 더욱 묵직한 무게를 갖는다.‘대항해시대’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대항해시대 2’다. 특히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 작품은 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모험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
15∼16세기 유럽 시대를 배경으로 6명의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세계 바다를 누비며 해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노른자위 교역로를 개설해 큰 돈을 벌고 유명 유적들을 발굴하며 병마와 싸우는 등 어떻게 하면 ‘항해’라는 것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는지 고심한 흔적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6명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서로 교차되며 라이벌이 되기도 한다는 점은 대단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여기에 유명한 작곡가 칸노 요코의 아름다운 음악은 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역할을 했다.
또 이 작품이 가진 탁월함은 교육적 요소에 있다. 세계를 너무나 즐겁게 탐험하면서 유저들은 자기도 모르게 각 나라의 수도가 어디인지 그 나라의 특산품이 무엇인지, 그리고 각 나라들이 어느 대륙에 위치해 있는지 등을 자기도 모르게 익히게 된다. 어쩌면 진정한 교육용 게임이란 바로 이런 작품이 아닐까.그런데 이제 이 게임도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바로 온라인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밝혀진 것이 단편적인 것밖에 없지만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과거에 느꼈던 짜릿함을 다시 맛보고 싶은 수많은 게임 팬들의 바람이, 온라인이라는 컨셉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생각하면 필자도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진다.
가끔은 해적이 돼 다른 유저를 괴롭히고 누구보다 먼저 황금 교역로를 만들어 부를 쌓기도 하며 끊임없이 싸웠던 상대와 동맹을 맺는 등 이미 유저의 머릿속에서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이 펼쳐지고 있다.
과연 어떤 작품으로 다시 한 번 게이머들을 놀라게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항해시대’를 즐겨봤던 유저라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광섭 월간 플레이스테이션 기자 dio@gamer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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