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서정욱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이사장(10)

(10)CDMA 사업을 책임지다

1993년 여름. 체신부 차관을 만나니 ‘장관의 뜻’이라며 CDMA사업을 맡아달라고 했다.

바로 10년 전, 한국전기통신공사(KTA) 기술부사장으로서 TDX사업을 맡아달라던 그였기에 “문제가 심각하구나”하고 직감했다. 얼마 후 전파관리국장 일행이 브리핑을 해줬다. 이어 장관을 만나니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를 만들어 한국이동통신(KMT)의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과 KTA의 ‘위성방송기술개발사업관리실’을 분과위원회로 둔다며, 협의회와 관리단을 담당해달라는 것이다. 통신정책국장 때 TDX사업을 지원해줬고, 장관으로서 CDMA사업을 걱정하는 충정에 무정할 수가 없었다.

CDMA사업은 KTA와 KMT가 출연하고 연구소(ETRI) 주도로 외국업체(퀄컴)와 국내업체(삼성·LG·현대·맥슨)가 디지털 이동전화를 공동개발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연구소에 원천기술이 없는데다, 아날로그 방식 공급업체들이 훼방하고 운용업체간의 이해가 엇갈리면 사업은 좌초하게 된다. 그래서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짓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업체 중에 삼성은 아날로그 방식을 개발해 수출에 나섰고, LG는 퀄컴과 직접 거래해 독자 개발할 생각인 것 같았다. 현대만 통신시장에 진입하려고 퀄컴 근방에 연구실까지 차려놓고 있었다. 단말기 업체인 맥슨은 출연금만큼 얻을 것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퀄컴은 CDMA 시범장치(RTS)를 한국에 팔고 시험 데이터만 챙기며 공동개발을 한다지만, CDMA칩 외엔 얻을 것이 없고 한국을 발판삼아 시장을 확장할 것이라는 평판이었다.

연구소도 어수선했다. 92년 4월과 5월에 소장이 나가고 들어오자, CDMA기술을 들여온 부소장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새로 임명된 이동통신기술연구단장이 사업을 맡게 됐다. 연구소는 자체요원과 업체요원을 통솔하기 위해 퀄컴에 팀장을 파견했었는데 소환하여 얼마 있다 내보냈다. 그런가 하면 연구단은 한국말만 잘 되는 보코더(Vocoder)를 연구해서 한국형 CDMA시스템(KCS)을 개발한다고 수십 명의 업체연구원을 차출하는 등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93년 말에 연구단장도 교체됐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연구소가 공동개발에 기여한 한국의 교환기기술, 양산기술, 품질보증기법 등을 퀄컴에 지불하는 기술료에서 차감하도록 하지 못한 것이다.

93년 9월 관리단은 KMT에서 10명, 체신부에서 사무관을 파견 받아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공동개발을 경쟁개발로 전환해 업체들을 경쟁시키기로 결심했다. 공동개발을 하다 공멸하느냐 경쟁개발로 하나라도 살아남느냐 비장한 조치였다. 업체들은 연구소 눈치를 보고, 연구소는 반발하니 체신부는 당황했다. 마침 체신부 파견관이 적나라하게 실상을 보고함으로써 관리단은 비상조치를 관철하게 됐다. 소신 있는 공직자가 있어 CDMA사업은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

나는 공동개발을 기관차와 객차로 비유하며 업체들에게 물었다.

“당신네를 끌고 갈 기관차에 엔진이 있는지, 기관사는 자격증이 있는지, 목적지가 어딘지, 언제 떠나 언제 도착하는지, 그리고 요금이 얼만지 따져보았는가.”

업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CDMA사업은 96년 초 상용화를 목표로 경쟁개발체제에 들어갔다.

juseo@kit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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