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식별번호 사라지나

유·무선 단일체계 전화 검토 중

 ‘전화번호의 주소와 족보가 사라진다?’

 인터넷전화(VoIP)와 가상사설망(VPN) 장비 전문업체인 디지털시스 김종호 사장의 명함에는 실리콘밸리가 있는 미국 새너제이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하지만 새너제이엔 이 회사의 지사가 없다.

 현지에서 분양받은 시내전화번호를 미국 고객들이 누르면 인터넷전화로 태평양을 건너 회사가 있는 분당으로 연결되는 것. 미국 고객은 시내전화 요금만으로 한국의 회사와 통화하고, 이 회사는 미국에 지사를 둔 효과를 볼 수 있다. 김 사장은 “미국의 협력사나 고객들이 한국으로 전화를 걸기 부담스러워해 현지 시내전화번호를 받아 사용한다”며 “지사없이 저렴하고 편리하게 현지 고객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한다.

 서울 태평로에서 분당 서현동으로 이사간 삼성물산(대표 배종렬)은 분당의 지역번호(031)대신 서울에서 사용하던 국번(02-2145)을 계속 쓴다. 서울 서초동에서 일산으로 이사간 하나로통신(대표 윤창번)도 서울번호(02-6266)를 버리지 않았다. 광화문이나 서초동 전화국에서 전용선을 연결하거나 착신전환(콜 포워딩)으로 전화를 당겨받는 것. 전화번호만 봐선 회사가 서울에 있는지 경기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조종관 KT 서초지사장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하는 기업의 경우 회선당 요금이 붙는 전용선을 연결해서라도 기존 번호를 유지하거나 대표번호만이라도 ‘콜포워딩(호전달)’해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국경이나 지역 경계를 넘나드는 번호가 등장하면서 번호만 가지고 어디로 연결되는 통화인지 주소를 확인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인터넷전화(VoIP)의 등장에 따른 기술발전과 콜포워딩, 전국대표번호(1588 등), 개인평생번호(050) 등 새로운 상품의 출시가 번호의 주소를 지우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한다. 조만간 ‘0N0’식별번호가 전국에 공히 부여되는 인터넷전화도 활성화할 전망이다. 유선망의 지역별 번호체계(DDD)가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번호이동성제 실시로 통신사업자를 알아내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내년말까지 시내전화 가입자가 통신사업자를 바꿔도 번호를 그대로 쓰는 시내전화 번호이동성이 전국에 도입되고 이동전화도 내년부터 시행된다. 특히 신규가입자에겐 ‘010’번호를 부여해 ‘번호의 족보’가 더욱 묘연해진다.

 정보통신부는 장기적인 과제로 유무선 전화번호를 별도의 식별번호 없이 9자리 단일 체계로 전환하는 문제를 검토중이다. 전화번호가 담고 있는 착신지역(국제·시외·시내), 사용서비스(유선·무선음성, 데이터) 정보의 의미가 작아진다면 번호의 변신이 머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한 전문가는 “지역이나 사업자에 귀속된 전화번호가 사용자에게 돌아오는 것”이라며 “전화번호가 국가의 공공자원인 만큼 효율적인 이용을 위한 전화번호의 변신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전화번호와 인터넷주소를 매칭하는 이넘(ENUM)이 도입되면서 일각에서는 기존의 전화번호 체계(E.164)의 전환 가능성도 고개를 들고 있다. KISDI의 한 연구원은 “아직은 공상적인 얘기”임을 전제로 “이넘은 현행 이동전화나 유선전화 번호를 중심으로 도입논의가 이뤄지나 도입 이후 유무선통신, 음성·데이터 통합이 성숙되면 국가별로 구분된 현재의 번호체계를 하나로 엮어 다시 구축하자는 논의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용석기자 ys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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