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이상 꾸준한 성장을 구가해왔던 가전산업 모델은 이제 많은 새로운 조건들이 등장함에 따라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비지니스 모델을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필립스 회장이 지난 8월말 베를린에서 열린 ‘IFA2003’ 국제전자쇼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한 말이다. 가전산업이 다시 성장가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혁신, 유연한 조직, 성장성있는 새로운 카테고리 산업의 발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가전산업’을 화두로 삼았지만, 비단 가전산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제 가전산업이야말로 IT산업의 한 핵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IT산업에 대한 전략 재수립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실제 ‘포춘 글로벌500’ 기업들의 실적은 세계 경기회복 지연 등으로 인해 2년 연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IT와 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신경제산업은 전통산업보다 순이익이 악화돼 서서히 한계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은 최근 자료에서 ‘포춘지의 글로벌500대 기업 가운데 95년에 매출 및 순익 면에서 50위안에 들었던 기업이 지난해에는 각각 35개, 23개에 불과했다’며 현재의 성공이 10년 후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지적했다.
아직은 IT산업이 세계 경제의 주축으로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현재 상태로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은 실적저조로 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산업 트렌드를 혁신시킬 ‘콜롬부스의 달걀’과 같은 신기술이나 신제품의 개발속도는 점차 더뎌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미래 전략 수립에 골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0년대에는 섬유화학으로 지탱했다면, 70년대는 중공업, 80년대는 가전·조선·자동차, 90년대는 IT산업이 성장동력이 됐다. 그렇다면 21세기는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할까?
지난해 1조엔(약 10조원)의 사상 최대 경상이익을 올린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생산 및 경영혁신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으로 대표되는 TPS(도요타 생산시스템)을 통해 비용절감과 재고최소화·결함제거를 할 수 있었고, 기존 이름을 과감히 포기하고 ‘렉서스’ 브랜드를 전략적으로 육성함으로써 지난해 매출과 순익 면에서 포춘지선정 글로벌500대 기업중 각각 8위·10위에 랭크됐다. 여기에는 50년간의 노사 무분규도 한몫했다.
캐논과 폴라로이드는 미래전략 수립 여부에 따른 성패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폴라로이드는 즉석필름 시장을 창출한 선도기업이면서도 디지털 카메라 시장을 간과하고 기존 제품에 대해 집착함으로써 지난 2001년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캐논은 디지털카메라 및 프린터 등 사무기기 시장에 주력해 지난해에는 순이익면에서 소니를 제치고 일본의 대표적 전자업체로 떠올랐다.
이처럼 최근의 어려운 경기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데 머무르지 않고 한단계 도약을 하고 있는 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가올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내 기업들도 미래 설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IT한국의 미래를 밝게 해주고 있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10주년을 맞은 지난 6월, 향후 5∼10년 후에 대비한 핵심사업으로 생명과학· 생활용 로봇사업·유비쿼터스 건강설비·반도체·소재부품·스마트 홈에 기반한 보안·네트워크 솔루션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삼성은 이 같은 전략을 통해 2010년에는 매출 270조원을 달성해 지난해 대비 1.9배 성장을 이루고 세전 이익은 2.1배로 늘어난 30조원을 거둔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신경영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선진국과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중국의 추격이 가속화되고 있어 자칫하다간 5∼10년 뒤 우리가 먹고 살 산업이 바닥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는데 사장단이 직접적으로 뛰어 줄것을 당부했다.
LG그룹은 디지털TV와 차세대 이동통신단말사업·정보전자소재사업·생명과학사업 등을 미래 핵심사업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LG그룹은 특히 ‘글로벌 1등’을 표방하며, 이를 달성할 수단으로 ‘정도경영’을 삼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이같은 미래전략은 지난달 28일 열린 CEO전략회의를 통해서도 재차 강조됐다. 구회장은 그룹 CEO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천 LG인화원에서 ‘글로벌 CEO 전략회의’를 열고 LG전자의 디지털TV, LG화학의 ABS, 그리고 LG홈쇼핑 등을 오는 2005년까지 ‘글로벌 일등 사업’으로 육성키로 했다.
SK그룹은 `생명과학`과 `현지기업화` 가 핵심 키워드다. SK는 생명과학 사업을 핵심 사업으로 운영하면서 SK 중국본사와 같이 현지기업화를 추구 전세계에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SK그룹 각 사는 경영기법과 기업 문화는 공유하지만 철저하게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을 위한, 현지인의 기업으로 운영되는 ‘현지기업 SK’를 세계 각지에 구축, 리더로 부상한다는 것이 장기적 플랜이다. 이를 위해 손길승 회장은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CEO 세미나에서 △사업모델 경쟁력 확보△글로벌 수준의 운영효율 개선△가치창출이 가능한 재무구조 확보 등 3대 조건을 주문했다.
KT그룹은 지금까지의 통신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가치있는 네트워크 기업(The Value Networking Company)’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선도적 글로벌 통신사업자로의 부상’이라는 글로벌비전을 수립하고, 시장확대 및 수익원 확보를 위한 글로벌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변신을 향한 IT업계의 몸부림은 비단 국내 기업들에만 그치고 있지는 않다. 소니코리아를 비롯한 필립스전자·한국IBM·한국HP 등 다국적 기업들도 본사의 장기 비전에 따라 변신에 가속도를 더하고 있다. 필립스는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로얄 필립스’라고 부른다. 굳이 회사명 앞에 ‘로얄’을 붙이는 것은 ‘왕실이 인정한다’는 의미로, 100년 이상 된 기업에 주로 붙여진다. 오일회사인 더치쉘과 항공사인 KLM도 각각 로얄 칭호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100년을 지속하는 기업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 중장기 미래전략을 튼튼하게 짜야 할 때다. 때마침 정부가 차세대 성장동력 추진계획을 밝혀 기업들에게는 미래전략을 설계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 갖춰지고 있다. <박영하기자 yh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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