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실험실`시대 활짝

실제실험 없이 슈퍼컴만으로 해결

 한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A 박사는 요즘 지질 탐사와 핵 관련 기초 연구를 수행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같은 연구실의 B 박사는 최근 세계적으로 화두인 나노 기술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옆 연구동의 C 박사는 원자 수준의 전자 스핀을 제어, 첨단 신소재를 개발하는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 연구에 밤낮이 없다. 하지만 이들에겐 실험실 조차 없다. 오직 컴퓨터만 있을 뿐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실제 실험실이 없이도 시뮬레이션을 통해 극미세 및 극한상황의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이른바 ‘거대 가상 실험실(Grand Virtual Lab.)’ 시대가 열리고 있다. 초당 수 조번에 달하는 연산능력을 갖춘 테라급 슈퍼컴 시대가 열리면서 과학기술 연구의 패러다임이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최근 IBM이 기증한 2.2테라플롭스급 클러스터 슈퍼컴 튜닝에 분주하다. 이 컴퓨터는 무려 1026개의 인텔 제온 2.4㎓급 CPU를 가진 512개의 서브컴퓨터를 빛으로 연결, 초당 2조회 이상의 실측 연산능력을 자랑한다. 오는 11월 가동할 이 컴퓨터는 실제 공간에서 물성 측정이 곤란한 나노 재료나 소자, 바이오 인포매틱스, MEMS 기술 등 첨단 연구에서 맹활약이 기대된다.

 KIST 미래연구본부 전산모사팀 이규환 박사는 “가상 공간에 거대 실험실을 구현, 기존 슈퍼컴으로 불가능했거나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던 미래 기술 연구를 간단히 수행할 것”이라며 “그래서 이름도 ‘grand.kist.re.kr’로 등록돼 있다”고 말한다.

 초고성능 슈퍼컴이 연구 현장에 적용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소재분야에서 컴퓨터 시물레이션 기술은 ‘정성적’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정량적’ 결과를 예측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만큼 기초과학 연구의 단위가 슈퍼컴이 아니면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 것이다. 이 박사는 “나노 단위의 초미세 재료의 움직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원자내 전자들의 운동을 모두 고려한 양자역학적 계산을 수행해야 한다”면서 “이런 일은 수 천개의 원자 및 전자들의 운동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테라급 슈퍼컴이 아니면 힘들다”고 강조한다.

 선진국들은 이미 SF 영화에서 나옴직한 고성능 슈퍼컴을 기초 연구에 집중 투입하는 추세다. 미국이 ‘테라 그리드(Tera Grid)’라는 대형 슈퍼컴 프로젝트에 8800만달러를 투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초고성능 슈퍼컴을 활용, 과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소프트 사이언스(Soft Science)’시대로 빠르게 진입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중배 jb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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