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기획]PC `EPR정책` 타당성 논란

 오래된 폐PC의 재활용 처리문제를 두고 정부당국과 PC 제조업계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올들어 환경부가 생산자책임재활용(EPR: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제도를 실시하면서 PC 제조업체들에 중고PC 재활용 쿼터를 배정하자 PC업계로부터 ‘현실을 무시한 정부의 환경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 92년부터 폐기물을 다량발생시키는 제조업자에게 사용 후의 회수 및 재활용 비용을 미리 부과한 후 회수 등의 실적에 따라 납부금을 돌려주는 폐기물 예치금 제도를 실시했으나 효과가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개정해 올초부터 PC·TV·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못쓰게 된 가전제품을 생산자가 회수해서 재활용하도록 의무화한 ‘EPR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내 9개 PC 제조업체에 연말까지 10만9000대의 중고 PC세트(본체+모니터=세트당 26㎏)를 회수, 처리하라는 할당량이 주어졌다. 현재 삼성전자가 4만세트, 삼보컴퓨터가 2만5000세트, LG IBM이 1만1000세트의 중고PC와 모니터를 처리해야 할 형편이다. 만약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PC 본체와 모니터의 무게만큼 PC 제조업체가 환경부과금(㎏당 165원)을 물어야 한다. 문제는 상반기가 끝난 시점에서 주요 PC업체가 집계한 중고PC 수거실적은 목표량의 10%에 못미칠 정도로 극히 부진하다는 점이다.

 2000여개 PC대리점망을 지닌 삼성전자조차 지난달까지 총 할당량 4만대 중 회수한 물량은 3500대에 불과해 이대로 가면 환경부담금을 무는 망신을 당할 판국이다. 해마다 수명이 다하는 중고PC 물량은 50만∼100만대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수거실적이 부진한 이유는 PC제품의 경우 유가성이 높아 정작 쓰레기장에 나오는 물건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PC는 아무리 오래된 구식기종도 환금성이 높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중고PC를 쓰레기장에 그냥 버리지 않고 단돈 1만∼2만원이라도 받고 민간처리업자에게 넘기는 것이 관행이다. PC는 노후기종도 뜯어보면 쓸 만한 부품이 많아 국내에서 버려지는 중고PC는 대부분 민간처리업자들에 의해 산업용 부품으로 재생되거나 동남아시아로 수출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PC 제조업체들은 모자라는 재활용PC 물량을 채우기 위해 자체 대리점과 학교, 공공단체에 구형PC를 보내달라고 협조요청을 하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별 소득이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불황에 시달리는 PC 제조업체들이 재활용 물량을 채우기 위해 전국을 돌면서 중고PC를 유상매입할 처지도 못되고 종합가전업체의 경우 여타 가전제품 회수품목과 형평성을 고려해서 돈을 주고 PC를 구입할 경우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회수한 이후에 계열사인 가전업체 등과 연계해 재활용공장이나 회수센터를 마련할 여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중소PC업체들은 재활용이나 회수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결국 PC 제조업체들은 연말까지 정해진 재활용 물량을 채우지 못하고 벌금납부와 기업이미지 실추까지 감내할 형편에 이르자 정부측에 적잖은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중고PC가 민간차원에서 충분히 재활용되는 상황에서 굳이 EPR 품목에 PC를 포함시켜 불황에 허덕이는 PC업계에 부담만 가중시켰다는 주장이다.

 PC 제조업체들은 EPR제도에 PC가 포함되는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회수되지 않는 품목인 점을 감안해서 기업체에 부과한 수거할당량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줄여주거나 다른 가전품목의 수거량을 늘려서 PC수거량을 대체하는 등 EPR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환경부는 TV·냉장고·세탁기·에어컨에 국한됐던 폐기물 예치금 적용대상 품목에 2001년부터 PC를 포함시킨데다, 이미 2년이나 유예시간을 준 만큼 원칙에서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환경부는 신규PC가 연간 250만대 이상 판매되고, 폐PC도 연간 50만대 이상 쏟아지는 상황에서 겉으로 보이는 PC 쓰레기가 적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 수거된 폐PC가 충분히 재활용되지 못하고 조악한 처리과정을 통해서 상당부분 폐기되는 상황을 고려해서 PC업계가 새로운 PC전용 재활용 시설을 공동으로 만들거나 기존 재활용 전문업체의 폐PC 처리기술 개발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업계 반발에도 불구하고 폐기물에 대해 제조업체가 책임지도록 하자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며 생산자가 직접 나서야만 실제적인 회수 및 재활용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환경부 자원재활용과의 한 관계자는 “초기 EPR제도 실행과정에서 올해 PC업계에 배정한 재활용 물량은 예정대로 시행할 방침이며 중고PC 유통실태에 대한 조사용역을 바탕으로 내년도 PC업계의 재활용 쿼터량과 부과금에 대한 재조정이 있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또 오는 2005년 휴대폰·오디오도 EPR제도에 포함시킨다는 방침이어서 가전업계와 마찰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한편 EU국가의 경우 전기전자폐기물 지침에 따라 80여개 가전품목에 대해 EPR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2006년까지 국민 1인당 4㎏의 폐가전을 수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본도 유사한 환경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은 PC 제조업체들이 소비자 요청이 있을 경우 자율적으로 폐PC 회수에 나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조자가 생산품의 AS뿐만 아니라 수거·폐기까지 책임지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재활용 분야에 대한 국내 투자가 아직 열악하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우리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문명의 이기로 널리 보급되던 PC가 1인 1PC 시대를 맞아 산업계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인터뷰-자원재생재활용협회 유의선 박사

 “PC업계에 과도한 부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환경보호를 위해 기업이 응당 해야 할 사회적 책무에 더욱 성실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한국자원재생재활용협회의 유의선 박사는 생산자 책임 재활용제(EPR)의 대상에 PC가 들어가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유럽·일본에 비해 우리나라만 특별히 앞서가는 상황이 아니라며 PC업체가 마지못해 끌려가는 태도가 아니라 전사차원에서 능동적인 입장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미 2001년부터 정부가 PC를 예치금 대상품목에 포함시켰으나 PC업체들의 준비가 미비한 점을 고려해서 2년간 유예기간을 줬는데도 이제와서 준비가 안됐다고 말하는 것은 성의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유 박사는 “PC 수거가 부진한 것보다 정작 수거된 중고PC도 제대로 재활용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영세한 재활용 처리업자들의 낙후된 기술로는 복잡한 PC부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PC 생산자가 재활용 과정에 직접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 소니가 이미 PC 본체에 PVC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외국 PC업체의 환경친화적 사업노력을 지적하면서 국내 PC업체들도 유럽연합이나 일본시장의 환경규제를 넘어서는 사전예방차원에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박사는 EPR의 본질은 생산자가 제품판매에 따른 AS 의무를 넘어서 환경문제까지 책임을 지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며 지금은 PC업체들이 환경문제에 더 성의를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뷰-대우컴퓨터 조창제 사장

 “기업이 환경보호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원칙에는 분명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PC 유통구조상 아무리 중고PC라도 마지막까지 돈을 주지 않으면 생산자의 손으로 돌아오질 않습니다.”

 대우컴퓨터 조창제 사장은 가전제품 중에서 PC는 회수가 좀처럼 어려운 한국적 특이상황을 고려해서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조 사장은 EPR제도에 다른 가전품목도 수거할 의무가 있는데 유독 PC만 수거가 어렵다고 해서 중고업자들에게 유상매입하는 사례를 남길 경우 향후 여타 재활용사업의 추진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적어도 PC만큼은 정부가 회수의무량을 지정하는 것보다 고객이 제품수거를 요청할 경우 해당 PC 제조업체가 회수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미국의 델·HP 등 세계적인 PC업체가 시행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생산자회수의무를 국내에 도입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PC업체가 무상제공되는 PC를 찾아서 전국을 돌 수도 없는 상황을 정부가 고려해주지 않으면 어려운 PC시장환경에서 중소PC업체는 경영부담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조 사장은 우리나라의 환경보호정책이 아직 선진국 수준에 못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PC처럼 애매한 품목까지 정부 정책의 권위와 원칙을 고집하면 기업활동에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면서 환경부측에 유연한 정책변경을 촉구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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