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 회고록’
SK텔레콤 수도권지사 마케팅기획팀 박정복 과장
(SK World 2002년 10월호)
고향에서의 유년기를 떠올리면 가난에 대한 기억이 많은 추억거리와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엄마·아빠가 일나가시면 누나는 저를 돌봐줘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또래들과 잘 놀지 못해 늘 불만이 많았죠. 거기다 학교에 갈 때 절 업고 가서 옆자리에 앉혀 놓고 공부를 해야 했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저에게 조기교육아닌 조기교육을 시킨 셈이죠.
누나가 절 떼어놓고 도망가는 날이면 사촌 형들이 절 돌봐줘야 했는데 형들의 놀이터는 우리 집 뒤의 나즈막한 뒷동산이었습니다.
형들과 형또래들은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버드나뭇가지로 칼을 만들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참나무 가지를 꺾어 새총을 만들어 참새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죠. 그때는 들에 있는 산딸기, 보리수 열매, 칡뿌리를 캐먹거나 영양식으로 참새나 개구리를 잡아먹는 게 영양간식거리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 귀한 시절에 먹성좋은 사내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이 형들이 대범한 사고를 치게 됐습니다.
영식형이 알을 낳지 못하는 늙은 닭을 안고 뒷동산으로 온 날, 형들의 눈빛이 일시에 빛나기 시작하면서 바로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서 기다란 바위 두 개를 가져와 양쪽으로 받침을 세운 뒤 그 사이에 산에 있는 건불과 나뭇가지를 가져와 불을 일으키고 죽지도 않은 닭의 양쪽 다리를 형둘이서 잡고 닭털을 그을리기 시작했습니다. 닭털이 타들어갈 때마다 꼬꼬댁 깩깩 놀란 닭은 이내 기절을 하더니 홀딱 알몸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쇠꼬챙이를 주워와서는 닭 몸뚱이에 꽂아 받침돌 위에 얹어놓고 골고루 불에 잘 익도록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통닭 바비큐를 만든 것이죠. 정말 기가막힌 아이디어 아닙니까.
지글지글 익어갈 때마다 떨어지는 닭기름에 불은 더 환하게 타들어갔고 누렇고 시커멓게 타들어간 닭껍질을 막대기로 긁어가며 먹는 맛이란…. 늙은 닭이지만 정말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전 어리다는 이유로 젤 맛있는 닭다리를 뜯는 행운이 있었죠. 그일 이후 영식이 할머니는 장에 내다 팔 닭 한마리가 없어졌다며 동네방네 수선을 떨었지만 다시 마을은 고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통닭 바비큐의 그 끝내주는 맛을 쉽게 잊지 못하는 형들이 이번에는 더 큰 사고를 치고야 말았습니다. 종식이네는 한 달 전 어미돼지가 새끼를 열마리나 낳아 종식이 아버지가 마을회관에서 막걸리 한 말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하루는 종식이 형이 새끼돼지 한 마리를 새끼줄로 묶어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마냥 끌고 뒷동산으로 모였습니다.
이번엔 통돼지 바비큐를 만들어 먹었다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새끼돼지가 끼이∼켁! 하고 얼마나 목청껏 울어대던지 동네 어른들이 올라올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 집에서 키우던 똥돼지 바비큐가 다 익자 얼굴과 팔에 검댕을 묻혀가며 귀신들린 사람처럼 먹는데 정말 그 맛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날 저녁 돼지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종식이 아빠는 동네를 쥐잡듯이 뒤지고 다니셨는데 며칠 후 뒷동산에 남아 있던 닭털과 돼지털이 그 증거물로 잡히고야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을 회관에 어른들이 모여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가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우리마을의 이장이셨던 종식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컸던지라 어른들 모두 종식이 아버지의 결단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종식이 아버지는 아무리 아이들의 장난이라도 내버려 두면 바늘도둑이 소도둑돼 소도 잡아먹을거라며 아이들에게 이번 일을 뉘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형들은 학교에 갔다오면 다시 뒷동산에 모였습니다. 신경통에 효과가 좋다는 지네를 잡고 지금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염소 똥만한 하얀 뿌리가 달린 약재를 캐고 살구씨들을 모아 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리곤 그 돈으로 영식이네 닭값과 종식이네 새끼 돼지값을 치러줬답니다.
가끔 고향을 찾을 때 하나둘씩 만나게 되는 형들의 모습은 배가 나오고 이마까지 훤하게 벗겨져 아저씨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유년시절의 그 사고치던 눈빛 그대로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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