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라의 일기
1973년 5월 11일
5월의 연휴가 지난 뒤의 금요일이 평화스럽다. 전전공사의 민영화를 앞두고 제3차 공무원제도 심의회에 답신을 준비하기 위한 작업반이 이 기누가와 온천에서 주말 3일간 집중대책회의에 들어간다. 본사에서 담당 상무 이하 기획·총무부서의 인원 7명이나 내려왔다. 그 중에 인사과장 요코다가 끼어있다. 뭔지 대하기 껄끄러운 놈이다. 조롱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이 놈을 참기가 힘들다.
더구나 아까 호텔 프런트에서 체크인하기 전에 어딘가 거는 전화에서 우연히 들은 말이 신경쓰인다. “어어, 그래, 사다코상. 그리고 그 친구도 여기 와 있지.” 이상한 말이다. 사다코라면 어머니의 이름이 아닌가? 그리고 그 친구도 여기 와 있다니 태스크포스의 나머지 6명 중에 전화상대인 사다코라는 여자가 아는 이가 있다는 말인가? 혹시 나? 뿌리치기 힘든 잡념이 괴롭힌다. 아무래도 이자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총무과장 스즈키로부터 요코다가 증발한 것이 1973년이라는 말을 듣고 아키라의 일기 중 1973년 부분에서 최초로 발견한 요코다의 언급이다.
“기누가와(鬼怒川)라면 도쿄에서 현을 두개가 지나야 하는데 회의하러 멀리도 갔네요.” 히로코가 입을 연다.
“음…” 이 일기를 읽고 난 에이지의 마음은 갑자기 엄청나게 복잡하다. 간단한 게임이 아니라는 강한 직감이 오기 때문이다.
“도대체 공무원제도 심의회라는 게 뭐에요?”
“그거야 우리같은 전전공사의 직원들이 모두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이었으니 민간기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신분을 바꾸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작업을 하는 회의겠지. 당시 이미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어 전전공사의 수뇌부나 정치권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던 기억이 나.”
“그럼 답신은 누가 누구에게 내는 거에요?”
“히로코상은 굉장히 호기심이 많네.” 실로 에이지는 히로코의 지적 호기심에 놀란다. 가정형편이 좋아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우수한 여성전문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심의회란 대개 총리대신의 보좌기구로 만들어지는 거야. 보통 20명 정도의 전문가로 구성되는데 대학교수 등이 주축이야. 특정한 국정사안에 대하여 총리대신이 숙제를 내면 심의회가 공부하여 대답을 제출하는 거지. 그런데 이 전문가란 사람들이 사실 실무적인 것까지는 잘 몰라서 사안의 대상이 되는 기업이나 단체가 뒤에서 숙제를 해주는 격이지. 말하자면 전전공사가 민영화될 때 직원의 신분에 관하여 전전공사에서 답변의 초안을 만들어 심의회에 주고 이를 심의회에서 가다듬어 총리대신에게 답신으로 제출한다는 이야기지.”
“아, 그래요! 그러면 매우 중요한 작업일텐데 아키라상이 그런데 끼었군요.” 히로코가 새삼 아키라의 능력에 감탄하듯이 말한다.
“글쎄 말이야.” 이점에는 에이지 본인도 놀란다. 1973년이면 입사한 지 4년째인데 그런 중요한 작업반에 아키라가 들었다니. 오일쇼크가 있던 그 해에 에이지는 지방에서 근무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당시 전전공사의 총재가 아키라를 인정하여 비서실인가에서 근무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입사 당시 인사계장이었다는 요코다라는 인물과 뭔가가 있네요.”
“글쎄 말이야. 그리고 요코다는 이미 인사과장이 되어 있었네. 인사과장이면 막강한 포지션인데. 공무원제도 심의에 주무과장으로 일했을 거야.”
“이 일기에 씌여 있는 사다코라는 인물이 정말 아키라상의 모친이었을까요? 뭔가 이것이 요코다의 증발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동감이야. 미스터리인데…”
“말이 행방불명이지 죽은 게 아닐까요?”
여기서 둘의 대화는 멈춰진다. 아키라가 마지막 일기에 썼듯이 요코다에게 죽음을 내렸다면 1973년 요코다의 증발이란 다름아닌 아키라의 살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점잖고 청순하던 아키라가 사람을 죽였다는 명제를 에이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자에 대하여 알아봐야겠다고 썼는데 그 다음에 뭐가 있을까요”하며 히로코가 벌써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아키라의 필체는 성격처럼 단정하여 알아보기 쉽다. 그리고 역시 문학적이어서 군데군데 시가 적혀 있다. 그 많은 시를 외웠을 리는 없고 수시로 시를 읽었던 모양이다.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치도록 요구받던 전전공사의 직원으로서 시를 수시로 읽었다는 것만도 이미 보통이 아니다. 시 등이 쓰여 있는 간단한 일기들이 지나가고 5월 26일에 가서 비교적 긴 글이 나온다. 고베에 내려간 기록이다.
아키라의 일기
1973년 5월 26일
오랜만에 고베에 내려왔다. 니시구치 다다오와 겨우 연락이 이루어졌다. 고베역 부근의 호텔바에서 만나다. 중학교 졸업 후 처음이니 10년도 넘는다. 녀석은 아버지가 이끄는 야마이치구미 고베지부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장래 와카가시라(若頭:조직폭력단의 2인자)로 촉망받는다는 소문이다. 놈은 아직도 어린 시절부터 내가 준 정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비밀리에 부탁을 해도 배신하지 않을 놈이다. 요코다 도시오라는 놈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혹시 어머니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도록 부탁하다. 나의 부탁 자체를 은혜에 대한 보답의 기회로 감사히 받아들이는 녀석의 모습이 또 한번 불쌍하게 보인다.
니시구치 다다오. 이 인물이 요코다 행방불명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자다. 도대체 누구일까? 일기에 의하면 조직폭력단의 젊은 단원이고 아키라의 친구이자 아키라 부친의 부하다. 그러면 살인청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간담이 서늘해지고 방안의 분위기가 싸늘히 식는다. 히로코도 묘한 얼굴을 하고 창밖을 내다본다. 6월의 해가 방으로 들어와 다다미가 더워지기 시작한다.
에이지가 일어서서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니 작은 공원이 아파트 담 너머로 보인다. 두명의 젊은 보모가 노란 원아복을 입은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나와 놀이에 한창이다. 병아리같은 애들을 보며 죽은 친구의 살인청부에 대하여 생각하자니 갑자기 만사의 순번이 뒤죽박죽 흐트러지는 혼란감을 느낀다.
“우리 나갈까?” 에이지가 히로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현관 쪽으로 발을 옮기자 히로코는 부랴부랴 핸드백을 챙겨들고 따라 나선다.
“카!” 닛보리역전의 우나기(뱀장어구이)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찬 맥주를 한잔 들이킨 마당이다. 아직 점심때가 안되어서 음식점 안은 조용하다. 상인이 많은 동네여서 대낮에 맥주 마시는 건 보통이다. 맥주를 두잔째 들이키고 단무지를 우적우적 씹은 연후에야 에이지가 입을 연다.
“이제 또 그 인간을 찾아 나서야겠네.”
“니시구치라는 사람 말이지요.”
“음… 아키라와 친구라면 내 나이 또래이고 아직도 극도(조직폭력계)에 있다면 상당한 간부가 됐을텐데. 아키라도 썼지. 장래 와카가시라로 촉망받았다고…”
“알아볼 방법이 있으세요.”
“글쎄… 그거야 찾아봐야겠지…”
“역시 그 사람에게 우선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이라니…”
“아시야시청에 근무하는 혼다상 말이에요. 아키라상의 중학교 후배라고 했지요. 그리고 진자의 히구라시 선생도 소개했고…”
“나루호도(과연)…” 에이지는 역시 히로코의 두뇌회전이 자신보다 빠르다고 느낀다.
에이지는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어 아시야시청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건다. 한참 있다 전화에 나온 혼다는 사무적으로 대답한다.
“호적계의 혼다입니다.”
“혼다상, 저는 며칠 전에 후지사와 아키라상 일로 찾아뵈었던 다나카 에이지입니다. 기억하시죠.”
“아, 네. 어떻게 됐습니까? 뭔가 나왔습니까?”
“글쎄, 아직은 여러가지로 알아보는 중인데… 혹시 니시구치 다다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
“모시모시, 모시모시…” 갑자기 상대방이 조용하여 전화가 끊겼나 싶어 에이지는 목소리를 높여 전화기에 외친다.
“죽었습니다.” 낮게 깔린 혼다의 말이 마치 저승사자의 목소리같다.
“죽어요?”
“네.”
“아니, 이럴수가…”
“전화 끊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후 에이지가 담배를 피워 물며 히로코를 쳐다보니 혈색이 하얗다. 도대체 며칠 사이에 사람 죽었다는 이야기가 몇번째인가? 둘이 비슷한 생각을 하며 넋이 나가 있는데 주문한 우나기돈부리(장어덥밥)가 푸짐하게 나온다. 그러나 우나기를 본 둘은 이 죽은 생물체를 태운 요리에 갑자기 식욕은커녕 구역질이 난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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