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사피엔스 이야기](62)로봇, 악몽에서 깨다

 모래와 석유가 많다는 먼 나라의 전쟁은 결국 그렇게 끝났다.

최강의 기술로 무장한 부자나라 군대의 진격을 방해하는 힘은 사막의 모래바람밖에 없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중동의 맹주 이라크는 불과 3주만에 수도 바그다드가 점령되면서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졌다. 미국은 향후 50년은 사용하고도 남을 석유자원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명분없는 전쟁을 한 목소리로 비난하던 국제사회는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전쟁 이후 미국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이번 전쟁은 향후 세계 로봇산업에도 커다란 분기점을 형성할 전망이다. 전쟁초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앵글로색슨 연합군이 거둔 군사적 대성공은 로봇과 기계에 의한 새로운 전쟁전략을 추구해온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고 향후 군사분야에 엄청난 자동화 수요를 창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거대한 군수업체들은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명실공히 로봇제조업체로의 변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동차를 용접하고 방청소나 하는 로봇을 만들 생각은 꿈에도 없다. 정부가 독점적 수익을 보장하고 자동차만큼 전후방 생산효과가 높은 새로운 로봇산업. 모든 전쟁시스템을 무인화하는 황금시장이 활짝 열린 이상 미국의 로봇산업은 수년내 군수업체들의 영향권에 흡수, 재편되면서 일대 도약의 계기를 맞이하게 됐다.

 지금 미국을 제외한 일본·유럽의 로봇업계는 한마디로 낭패감을 느끼고 있다. 인류의 복지를 위한다며 생산라인에서 정밀도를 높이고 가사노동을 돕는 로봇개발에 매달려온 보통 국가들의 로봇산업과 군사용 로봇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로봇산업이 확연히 갈리고 머지않아 양측의 기술격차는 따라잡기 힘든 수준으로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을 제외한 다른 어떤 강대국도 자체 전쟁시스템을 무인화시킬 테크놀로지와 자금력, 정치적 환경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이라크전을 통해 검증된 로봇무기의 전술능력은 향후 10년 안에 성숙단계로 들어가고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우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적절히 통제되지 않는 과학기술은 이를 가진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과거 유럽인들은 총포의 힘을 앞세워 다른 문명국가를 제압하고 제멋대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라크가 미·영 연합군의 첨단무기 앞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너진 사실은 이미 로봇기술이 서구문명의 치명적 지배도구로 자리잡고 있음을 입증한다.

 인류에 행복한 미래를 줄 것처럼 보이던 첨단 로봇기술이 한편으로 국제사회의 기본질서를 뒤흔드는 무소불위의 주먹처럼 남용되는 현실은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84년 살인로봇이 인류를 말살하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개봉 당시 관객들은 그저 재미있는 악몽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오래된 로봇영화에서 본 악몽은 지금 우리에게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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