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가다듬은 에이지는 눈을 감고 있는 히구라시에게 간단히 자살의 정황을 설명한다. “음, 결국 가고 말았구만…. 그 아이는 원래 일찍 갈 운명이었어.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번뇌가 너무 많았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히구라시시가 신음처럼 뱉는 말이다.
“선생님, 실은 아키라군이 제게 일기를 다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런 죽음을 택했는지 내력을 밝히고 싶어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후지사와 가문의 내력을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히구라시가 아직 입을 안여는데 문이 열리더니 다른 미코가 버선발을 들지도 않고 소리없이 미끄러져와 일본차를 놓고 나간다. 대단한 미녀다. 햐, 저런 미녀가 이런 신사 안에서 썩고 있다니, 하는데 히구라시가 “오차오 도조”하며 차 마시기를 권한다. 눈을 감고도 에이지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단 말인가? 히구라시가 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눈을 뜬다. 아까보다 눈이 덜 선 것이 쳐다볼 만하다. “들어오면서 도리이를 잘 보았던가?”하고 히구라시가 묻는다.
“네, 도리이가 두개더군요.”
“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진자가 이나리진자란 말일세.”
“아, 네….”
이나리(稻荷)진자란 농업이나 상업의 번성을 기원하는 신사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나리진자에는 사업가들이나 장사꾼들이 신도로서 많이 온다.
“우리 덴구진자는 아키라군의 부친, 즉 후지사와 데츠로상의 기부로 지어진 진자야. 즉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존재하던 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물론 다른 신도도 받아들였지만 말이야.”
“허…” 에이지와 히로코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정도의 진자를 지을 정도라면 엄청난 돈을 기부했을 것이다.
“데츠로상은 대단한 인물이었지. 남자로서나 사업가로서나 말이야.”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하셨습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조총련 활동을 하다가 처음 사업으로 철폐업을 하였지.” 철폐업이란 헌 건물 등을 헐어 깨끗한 공사부지로 만들어 인도하는 일이다. 일의 속성상 왈패가 많이 끼어 하는 일이다.
“철폐업으로 기반을 닦은 후 고베와 오사카에서 부동산업으로 대성했어. 특히 상가나 상업용 건물을 많이 소유했지.”
“원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습니까?” 후지부동산에서 들은 말이 기억이 난 에이지가 물어본다.
“내가 알기로는 별로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데츠로상의 부친은 원래 조선의 동래라는 곳에서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와 기술을 배워 무슨 전화회사의 부품을 공급하는 공장을 하셨다는구만. 하지만 큰 돈을 만지지는 못했을 걸…. 큰 돈을 만든 것은 데츠로상이야. 지금은 사람도 돈도 다 없어지고 말았지만.”
다음에 무슨 질문을 할까 생각을 더듬는데 히구라시가 거꾸로 물어온다.
“그래, 자네는 아키라와 어떤 관계인가?”
대뜸 ‘자네’라는 말에 다소 부아가 올라 히구라시를 올려다보니 얼굴은 그리 늙지 않았는데 목을 보니 상당히 나이가 있어 보인다.
“네, 대학교 동기생입니다.”
“그대는?”하며 히구라시가 히로코를 바라본다.
“….”
“애인인가?”
부부가 아님을 간파하는 히구라시의 눈에 둘은 내심 놀란다.
“잘 어울리는 인연이야. 늦게 맺어졌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에이지가 어색하게 대답을 한다.
“선생님은 원래 극도(極道)의 분이십니까?” 다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에이지가 용기를 내어 묻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원래 깡패 출신이냐는 이야기다.
“음…” 히구라시는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눈을 감고 말을 않는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여 봉변이라도 당하는가 하고 에이지가 내심 당황해하는데 히구라시가 입을 연다.
“원래 데츠로상과 나는 야마이치구미에서 선후배로 같이 자랐지. 데츠로상이 나보다 한참 선배였으니까. 고베구미의 가시라(頭, 즉 두목) 자리를 놓고 내가 도전을 해서 졌네. 그때 이 손마디를 잃었어”하며 새끼손가락을 보인다. 일본 야쿠자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스스로 손마디를 칼로 잘라내는 것이다. 야쿠자 출신이라고 신사의 간누시가 되는 것이 놀랄 것도 없다. 일본 신사의 성직은 결혼한 사람이나 속세의 사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하긴 트럭 운전수를 하며 파트타임으로 수도를 해 간누시가 된 고교동창생이 있지 않던가?
“그럼 아키라군을 어렸을 때부터 잘 아셨겠군요.”
“알다마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매우 영리한 아이였지. 그러나 아버지의 피보다 엄마의 피를 많이 받았는지 너무 순진하고 여성적이 편이었어. 그리고 아버지보다는 엄마를 훨씬 따랐지. 친모복합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게 심했어. 하긴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라곤 벌로 없었고 있어도 무섭기만 했을테니.”
“그럼 어린 시절의 이야기군요?”
“그렇지. 그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가 야쿠자라는 것이 교육에 나쁠까봐 도쿄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니.”
“그후론 만난 일이 없습니까?”
“없어. 하지만 데츠로상을 통하여 가끔 이야기는 들었지. 공부를 아주 잘했다더군…. 하지만 그애는 내가 사주를 아는데 일찍 세상을 뜰 운명이었어. 매우 외로운 사주를 가진 사람이었지. 아마도 조부의 고(孤)가 손자에 대물림을 하였는지 몰라.”
“아키라군의 부친을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음… 심한 당뇨로 눈이 어둡고 하반신의 모세혈관이 부패하여 다리를 잘 못썼는데 아마 95년 대지진 때 자택의 계단에서 굴러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네. 아무튼 사망 후에 간호원이 방문하여 발견하였는데 사인은 뇌진탕으로 판명되었어.”
“데츠로상은 젊어서 코냑을 너무 좋아했지. 그 당분 많은 코냑을 한창 때는 하루에 한병씩 마시곤 했으니. 옆에서 오줌을 누자면 소변에서 향긋한 코냑 냄새가 날 지경이었어.” 히구라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야쿠자로서 한창 놀던 시절을 회상하는 모양이다.
“아키라군의 모친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마 기요세에 있는 국립도쿄병원에 계실 걸세.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입원했다 퇴원했다 한 걸로 알고 있네. 불행한 여인이지. 정신병에 결핵까지 걸려 고생을 하고 있으니. 다만 참 희한한 일이야. 남편과는 다르게 매우 품위있는 여성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담배와 술에 입을 대기 시작했으니…. 지금도 그 변모는 이해가 안되네. 데츠로상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부인의 속을 파괴할 만한 분은 아니었는데….”
“내가 음악을 잘 몰라도 젊었을 때 후지사와 부인이 오사카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공연한 곳에 가본 적이 있지. 대단한 미인이었어. 솔직히 데츠로상에게는 좀 과분한 여자라고나 할까?”
“후지사와 부인도 조선계입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히로코가 묻는다.
“음… 이제 와서 뭘 숨기겠나. 아마 그럴거야. 데츠로상은 내게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다른 부하가 술에 취해 내게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나. 데츠로상의 부친과 부인의 부친은 오랜 전부터 가까운 친구라고… 그리고 데츠로상이 고교를 졸업하고 조총련 활동을 하였는데 그때부터 부인을 알았다던가? 데츠로상은 고졸이지만 부인은 대학을 나온 것으로 알고 있어.”
히구라시에게 인사를 하고 본당을 나섰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워 태양과 풍광이 신사 안에 그득하다. 본당 앞에서는 처음에 안내했던 미코가 긴 비로 마당을 쓸고 있다. 흰 저고리와 긴 붉은 치마가 신사 주변의 수목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이름 모를 꽃과 풀이 우거진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히로코가 괭이밥 꽃을 따 묶으며 지나가는 투로 묻는다. “히로시상, 우리 처음 만난 지 얼마나 되지?”
“글쎄, 한 십년 되나?”
“저렇게 세월을 모르니. 13년이에요.”
“그래?”
“그 사이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뭐야, 나 요새 너무 놀라는데 더 놀라게 하지마.”
“사실은 나도 조선계에요. 우리 부모는 원래 제주도 출신이고 히로시마에 정착하셨다가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키타로 이사하셨어. 그래서 그런지 데츠로상이나 부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에이지에게는 또 하나의 충격적 사실이다. 아무 말 없이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것에 대하여 막연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내가 실(實)이라고 믿었던 것이 허(虛)이고 허가 실이 아니었던가?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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