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가 도미한 것이 약 15년전 이라…. 당시는 JTT로서 매우 격동기였고 에이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1985년 JTT는 민영화하여 공사에서 주식회사로 바뀐다. 이 민영화에 따른 조직개편으로 에이지는 도쿄 근교 무사시노에 있는 연구소에서 동북부 미야기현의 후쿠시마 지사로 발령나게 되며 이로써 그의 덜컹거리던 결혼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아키라의 비밀을 캐는 제일보라고 생각했던 에리카의 소재가 파악이 안되자 당혹스럽다. 아까 오던 길의 건너편 인도를 따라 역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깨끗한 소바(메밀국수)집이 보인다. 김을 썰어 얹은 자루소바를 천천히 씹으며 다음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을 생각해본다. 아키라의 일기를 읽는 것은 당연한 코스이지만 방대한 일기를 읽기 전에 배경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키라의 죽음에 관하여 회사에서 연락이 갔다 하더라도 친구인 자신이 찾아가 위로의 말이라도 하며 사정을 듣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에리카가 미국으로 간 것이 1985년 경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이 시기라면 분명히 아키라가 본사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고 사생활을 희생하기 쉬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추측이 여기에 미치자 당시 아키라가 회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파악해야 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소바집을 나온 에이지는 총무과장 스즈키에게 다시 전화를 넣는다.
“스즈키입니다.”
“어이, 날세. 다나카야.”
“네, 선배님.”
“자네 내 말 잘 들어. 지금 죽은 후지사와군 전 부인의 백부되는 분의 댁을 방문하고 나왔는데 말야…. 전 부인은 미국에 유학을 가서 미국인과 결혼하였다는구만.”
“그래요?” 스즈키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서도 관심을 가지고 듣는 기력이다.
“사실은 후지사와군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자네 나 좀 만나. 잠깐이면 돼.”
“선배님, 제가 지금 조금 바쁜데….”
“매우 중요한 일이야. 한시간이면 돼. 내가 곧 구니타치역에서 출발하니 3시에 만나자. 회사에서 나와 신바시 쪽으로 돌면 아카네라는 다방이 있지. 그리로 와. 그리고 말야, 올 때 1985년 민영화를 전후로 하여 후지사와군이 사내에서 무슨 직책을 맡았었는지 알아보고 오게. 우리가 죽은 고인을 위하여 해야 할 숙제가 있어.”
“알겠습니다.”
도쿄대 후배이고 아키라와 에이지의 관계를 조금을 알고 있는 스즈키는 시원스럽게 대답한다.
1999년 6월 5일, 히비야의 다방 아카네.
일본 소바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암을 예방하며 칼로리가 적어 중년의 음식으로는 최고인데 점심때 먹으면 졸음이 오는 단점이 있다. 다방 아카네에 들어선 것은 아직 두시반이어서 에이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속에 한동안 꾸벅거리며 존다. 여름의 낮잠은 시원하다. 화장실에 가 소변을 보고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오니 마침 스즈키가 들어온다.
“그래, 좀 알아보았나.”
“네. 후지사와상 역시 당시도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민영화가 정식으로 스타트한 것은 1985년 4월 1일 아닙니까? 하지만 그 전부터 JTT 민영화에 따른 경영형태변경이라는 것이 첨예한 정치적 이슈였는데 이를 다루는 부서로 1983년에 JTT 총재 직할로 기획실이라는 것이 생겼어요. 후지사와상이 여기에 배속되었고 당시 직급은 과장대리였지만 곤도 총재의 수행비서를 하며 정치가 등을 상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허, 그래?”
엔지니어로서 본사의 수뇌부와는 거리가 먼 회사생활을 해온 에이지는 마치 영화 이야기 듣는 듯이 생소하다.
“그리고 민영화가 시작되는 85년에 가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인 주식발행 등을 다루는 경영관리회계 추진실이라는 총재실 안의 태스크포스팀의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나야 문외한이지만 당시 일본의 정치거물들인 나카소네, 가네마루, 하시모토 등이 모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단했겠구만.”
“네, 그야말로 불속에 사는 히다루마(火達磨)같은 생활이었을 겁니다.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고 엄청난 압력속에서 개인생활같은 것은 없었을 거에요.”
“음….”
스즈키의 말을 듣고 나니 무언가 납득이 간다.
“그런데 선배님. 아까 전화로 중요한 일이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네 믿고 이야기 할테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사실은 말야. 후지사와군이 투신하기 직전에 내게 자신의 일기를 다 주고 갔어. 전철역의 라커에 맡겨놓은 상태로 말야. 자네도 얼추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후지사와군과 나는 대학시절 야스다 강당 사건에 같이 가담했고 개인적으로 믿는 친구일세. 그가 내게 일기를 맡겨놓고 갔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의 사연을 이해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겠군요.”
그제서야 스즈키는 의문이 풀리는 모양이다.
“일기 읽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우선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텐데 말야.”
“그 문제로 저도 좀 의문이 있는데, 후지사와상이 이혼 후로는 기본적으로 도쿄에서 독신으로 계셨고 주민등록상으로도 호주여서 연락할 사람이 없어요. 과거 인사기록에는 본적이 고베로 되어 있어 주소지에 전보를 보냈습니다만 아무 연락이 없어요. 후지사와상의 사회적 신분으로는 다소 의아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결국 아키라군은 고아 비슷한 존재였구만.”
“그렇지요.”
“분명히 부모님은 계셨는데…. 자네,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가끔 연락할테니 도와주게.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아키라군의 회사내에서의 행적에 관해 좀 알아봐.”
“네.”
“그리고, 잊지 말고 아키라군의 본적지 주소를 네게 e메일로 좀 보내주고.”
“알겠습니다.”
스즈키가 자리를 뜨고 나서 시간을 보니 네시가 넘었다. 마음이 공허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회사에는 며칠 쉰다고 말해놓았으니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회사와 자신은 이제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다. 오랜만에 히로코나 만나러 갈까? 히로코는 도쿄 시다마치 중의 하나인 긴시초라는 곳에서 작은 스낵바를 경영하는 여자다.
1999년 6월 5일, 도쿄 긴시초 역전.
따르르릉. 쿵짝쿵짝. 피비빙. 온갖 잡소리는 다 들린다. 담배연기는 자욱하고 퀴퀴하다. 일본의 모든 것이 망해도 건재할 파칭코 팔러이다. 히로코가 가게 문을 열려면 아직도 세시간은 있어야 해 에이지는 긴시초역 앞의 파칭코에서 시간을 죽이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성적이라면 만엔이면 두시간 이상은 버틸 수 있다.
조금 큰 장난감같은 기계 앞에 앉아 작은 구슬을 튜립이라 부르는 구멍에 집어넣는 단순한 오락에 왜 일본 전역이 아직도 열광하고 있는지 가끔 하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빈 옆자리에 시장바구니를 든 아낙네가 앉는다. 허파에 바람든 년… 가서 시장이나 보지. 같이 파칭코를 하는 주제에 못생긴 젊은 주부가 영 마땅찮다. 모든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고 친절한 척하고 튀는 행동은 금방 박살이 나고 마는 규율의 사회 일본에서 파칭코는 일종의 해방구다. 얌전해 보이는 숙녀가 담배를 피며 구슬놀이에 열중하건 젊잖은 신사가 침을 흘리며 졸건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터져나오면 돈이 되는 구슬을 콧구멍 만한 튜립에 집어넣는 일에 모두 신앙처럼 열중이다.
오른 손으로 구슬을 쏘는 레버의 강도를 적당히 조정하고 왼손으로 담배를 하나 피워 물자 말도 안되는 일본풍 록음악이 그치고 에이지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푸른 바다를 보며 전쟁에서 죽은 자식을 그리는 군조(群靑)라는 다니무라 신지의 노래다. 눈은 연신 튀어나오는 구슬을 보며 마음은 히로코에게 간다. 에이지가 지방근무를 마치고 도쿄로 올라와 이혼수속을 모두 마친 후 우연히 알게 된 여자다. 애인도 아니고 동거녀도 아니고 어정쩡한 관계다. 다만 둘 다 외로운 사람이고 뜨겁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 정이 있을 뿐이다. 조금 후에 볼 수 있다 생각하니 정욕이 느껴진다. 자욱한 담배연기, 뇌를 뒤흔드는 소음으로 가득 찬 파칭코 팔러에 앉아 갑자기 정욕을 느끼다니…. 히로코에게 미안하고 안스러운 마음이 저절로 고인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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