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준 CJK스트래티지 사장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한 후 남북경협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저조해지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분위기 속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일본이다. 시작은 지난 9월 17일 있은 일본 수상 고이즈미의 평양방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나 미국과의 충분한 조율도 없이 행한 고이즈미의 평양방문은 양측에 모두 정치적인 모험이었다.
고이즈미로서는 정권 출범 초기의 인기가 날로 저하되고 경제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평양회담의 실패는 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지금까지 매우 중시하던 체면을 벗어던지고 일본인의 납치를 인정하고, 나아가 대한항공기 폭파에 가담한 김현희의 증언에 나온 이은혜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모험에 가까운 결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대한 결단은 두 가지의 전략적 판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첫째, 극도로 악화된 경제사정, 특히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한 자금의 동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됐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서 목격한 가공할 군사력에 북한은 진정한 공포를 갖게 됐으며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루트로 일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의 평양방문은 일단 성공적으로 평가돼 정권지지율을 급속히 올려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일관계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묵은 문제들을 새롭게 야기시키며 남북교류에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형편이다.
첫째, 정상회담을 계기로 확인된 피랍자 8명의 사망과 일본으로 일시 귀국한 피랍자들의 일본체류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국민의 분노가 이례적일 정도로 강하고 분명하게 표현돼 오랜 만에 단결의 계기를 주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을 경원하는 국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이는 대북전쟁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쓰고 있다.
둘째, 북한문제를 둘러싸고 미일 관계가 냉랭해지고 있다. 대북교섭을 주도해온 외무성의 아시아대양주국장을 놓고 미국정부가 ‘불안한 인물’이라고 평할 정도로 일본의 대북외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정부 내부에서는 강경노선의 북한불신파와 타협노선의 교섭중시파가 대립하며 모처럼 거둔 고이즈미 정권의 외교적 성과를 잠식하고 있다.
셋째, 날로 악화되는 일본인의 대북여론 속에서 북한이 노리는 일본 경제협력의 장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식민지통치에 대해 줄기차게 ‘배상’을 요구해오다 최근 ‘경제협력방식’으로 격하한 안을 받아들인 것은 북한수뇌부의 또 하나의 큰 양보였다. 그러나 일본인 납치, 핵개발 인정, 부시정권의 중유공급 중단 등 일련의 사태는 북한의 협상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켜 앞으로 경제협력교섭이 이뤄지더라도 북한이 받아낼 수표의 액수는 희망보다 형편없이 적아질 공산이 크다.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 ‘의연하게’, 즉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일본의 합의가 됐다.
넷째, 대북문제가 일본경제와 연계되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 금융개혁의 와중에 조총련의 통제를 받는 조은(朝銀)신용조합들에 대한 구제금융기구로부터의 공적자금 도입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일본국민의 세금을 북한에 빼돌리는 조총련계 은행의 구제에 쓸 수 없다는 여론이 표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최대 외화공급원이던 조은신용조합들의 연쇄적 파산에 이어 공적자금 도입이 불발이 될 경우 북한의 외화 캐시플로는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것이며 이는 다시 북한의 전략적 옵션을 더 옹색하게 만들어 강경으로 유도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 진전은 대북한 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의 일부 종합상사·통신기업·IT기업의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고 대북경협에 호의적인 정계 및 재계 지도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통신을 포함한 북한의 사회간접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해 국제적인 공조체제가 필수적이며 이에 일본의 협력이 불가결하다는 점에 비춰볼 때 최근의 상황은 매우 염려스럽다. 북한의 경제특구니 하는 국지적인 이슈에 집착하지 말고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경제환경을 조감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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