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이 전신을 배우기 시작할 때 전신기술은 이미 수신되는 점과 선을 인쇄해 문자로 번역하는 방식에서 소리를 듣고 직접 전신기사가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화된 상황이었다.
이 방식으로 일급 전신기사들은 1분에 40∼50개의 단어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초보자에게는 전신부호를 구분조차 하기 어려워 많은 숙달이 필요했다. 특히 청각장애자였던 에디슨에게는 전신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어 장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디슨은 한쪽 귀의 청각장애가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주변의 산만한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전신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디슨의 한쪽 귀의 장애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추측의 하나로, 열차에 차렸던 실험실의 화재 당시 화가 난 차장이 에디슨의 따귀를 때렸는데 그때 귀가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디슨은 이 사실을 부인했다. 열차에서 신문을 팔고 있을 당시 출발한 기차를 쫓아 갈 때 승무원이 자신을 기차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귀가 당겨졌고, 그때부터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의 추측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앓아 온 성흥열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만큼 어린 시절 에디슨은 자신의 신체 한곳에 장애가 발생해도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았다.
전신기술을 배우는 동안 에디슨의 귀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약점을 운명적인 기회로 잘 활용해 전신음에 대한 집중력을 발휘하였고, 이후에도 외부잡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잠을 깊게 잘 수 있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에디슨은 매킨지 역장 밑에서 다섯달 동안 전신기술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열차에서 신문 파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마운트클레멘스 역까지만 간 후 그곳에서 전신기술을 배웠다. 그때 매킨지 역장은 다른 소년에게도 전신기술을 가르치고 있어서 에디슨은 자연스럽게 그 소년들과 서로 전신을 주고받으며 연습할 수 있었다.
에디슨은 포트휴런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도 전신연습을 하기 위해 스스로 전신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1.6㎞ 떨어진 친구의 집에까지 직접 전신선을 연결한 후 매킨지 역장에게 배운 전신기술을 연습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1863년 여름, 전신기사 훈련이 모두 끝났다. 에디슨은 포트휴런에 있는 토머스 워커의 보석상에서 전신기사로 시간제 근무를 시작했다. 토머스 워커의 보석상은 마을의 전신국 기능을 하기도 했다. 에디슨은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과학관련 잡지를 읽거나 서툰 과학실험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보석상에서 커다란 폭발 소리가 들렸다. 에디슨이 화학실험을 하다가 폭발사고를 낸 것이다. 그는 전신기사 일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해고당했다. 그 후로부터 1867년까지 4년여 동안 에디슨은 뜨내기 전신기사로 이 직장 저 직장을 옮겨다녔다. 전신기사들의 작업장은 비좁고 더러웠으며, 어수선했다. 그들 대부분은 남는 시간을 누추한 하숙집에서 술을 마시고 음란한 소설을 읽으며 보냈으며 씹는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에디슨 역시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술 한잔만 마셔도 잠이 드는 그는 술자리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체질적으로 몸에 받지 않는 술은 남과 어울리는 데는 고통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생각과 시간을 발명에 전념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만일 술이 그의 몸에 맞았다면 그 발명품 하나 하나의 실패와 성공의 과정에서 술에 많이 의존했을 수도 있고, 그만큼 발명에 전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전신기사로 일하는 동안 친구를 사귀기도 했지만 에디슨은 동료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는 장난도 발명적으로 했고, 동료들을 그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에디슨은 직장의 상사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사고를 일으키거나 업무에 부주의해서 자주 해고당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스트렛퍼드에서는 열차사고를 일으켜 처벌을 받을 뻔했고, 루이스빌 전신국에서 일할 때에는 실험을 하다가 전지용 염산이 들어있는 용기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염산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 아래층 사무실에 있는 카펫과 가구를 못쓰게 만든 일이 있었다. 사장은 회사는 실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신기사가 필요하다며 그를 쫓아냈다.
그무렵 에디슨은 영국의 과학자 패러데이가 쓴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에 수록된 각종 실험방법을 직접 되풀이하여 실험하고 있었다. 어느날, 실험에 열중해 있던 에디슨은 한순간 떠오른 생각에 소리를 질렀다. 전기를 이용하면 기계만으로 수를 셀 수 있고, 그것을 투표에 이용한다면 투표수를 자동으로 빨리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전기학을 비롯한 과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던 에디슨은 첫 실험에 쉽게 성공했고, 자동투표기록기에 대해 특허출원을 했다. 그가 첫 특허를 얻은 해는 1868년, 불과 21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투표결과를 정당하게 발표하지 않는 어지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에디슨의 발명품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당시 의회에서는 수기로 투표를 행하면서 시간지연 등의 방법으로 표결 통과를 저지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던 터라 에디슨의 발명품은 사용되지 않았다.
에디슨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며 쓸모있는 것을 만들 거라고 약속했다. 발명을 위한 발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발명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에디슨의 다음 발명품은 ‘주식 상장 표시기’였다. 이것을 만드는 데는 채 한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에디슨은 한번 습득한 기술을 통합시키는 기술이 탁월했다. 주식 상장 표시기는 곧 주식을 통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이어 새로운 발명이 이뤄질 때마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널리 알려져 유명해졌고, 경제적으로도 부자가 되었다.
당시 에디슨의 발명품은 과학사에 길이 남을 만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드디어 1876년 4월, 29세의 에디슨은 멘로파크에 연구소를 차렸다. 그동안 발명으로 번 돈을 모두 투자해서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설비들을 갖췄다. 기차의 화물칸 구석, 집안의 허름한 창고에서 어렵게 연구해왔던 에디슨에게 본격적으로 발명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가 주어진 것이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에디슨은 성공의 비결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하루 18시간 일합니다. 그러한 일을 45년 동안이나 계속해왔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의 두배가 되는 노동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90년분의 일을 한 것이 됩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 동안을 더하면 110년을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매일 18시간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 20년은 이 생활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는 150년을 살아가게 됩니다. 누구든 이렇게 일하면 남의 갑절되는 성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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