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 50명 안팎이었던 직원이 최근까지 100명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의사결정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덩치는 커졌지만 제대로 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기업의 새로운 비전으로 글로벌 브랜드 육성, 고객 만족 극대화 등을 내걸었습니다.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죠.”
IT인의 정체성 찾기가 새로운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흔히들 ‘정체성의 위기’라는 말을 한다. 지난해부터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벤처기업의 정체성 확립이니 IT산업의 정체성 문제가 도마 위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새롭게 전개될 미래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IT업계에 종사하는 기업인이 새로운 정체성 확보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일본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 고바야시 고이치 교수는 “무한한 미래를 보장할 것처럼 보였던 IT산업이 침체기를 맞으면서 그 목표가 불투명해지고 있다”며 “디지털 세대를 자처하면서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이모티콘 등 감성 위주의 단편적인 오락에만 빠져있기보다 과거의 정책과 성과를 분석하고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정체성의 확립을 따지기 전에 우선 그 개념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IT인이 필요로 하는 정체성을 단순히 IT인이 갖춰야 할 덕목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의 사례처럼 몇 마디 구호와 비전 제시로 기업이나 사원들이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체성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철학의 영역에 속한 형이상학이다. 어떤 사물이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 사물로 인식되거나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이 전통적인 정체성의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짚어봐야 한다.
IT산업의 격변기를 거쳐온 IT인들의 정체성은 현재 그들이 IT인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다른 여타 산업 진단과 구별할 수 있도록 규정지워주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가령 한국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한국인 개개인의 공통된 성향이나 특질을 찾아내 이를 합성한 것이 한국의 정체성이라 말할 수 없지만 한국이라는 집단이 갖는 여러 분야의 공통된 특성을 찾는 것은 가능하다.
정체성의 문제는 항상 현재 시점에서 탐구해야 하기 때문에 다가올 20년의 IT인의 정체성은 ‘현재 IT인의 모습이 어떠한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K이동통신회사의 기업 이미지 광고를 상기해보자.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젊은 청년이 이른 아침 거리를 유유히 활보한다. 때마침 옆을 지나는 중형 승용차의 창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찬다. 청바지에 헬멧쓰고 출근하는 요즘 젊은이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중년의 남자가 업무상 찾아간 회사의 대표이사실에는 아까 그 젊은이가 미소를 띄며 브리핑 자료를 뒤적이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것은 금방 벗어놓은 듯한 인라인 스케이트.
‘K회사적인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는 광고 카피를 내세워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재즈만큼이나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제목으로 연세 지긋한 학생과 갓 부임한 듯한 젊은 교수를 대비시킨 2탄 광고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광고는 최근 사회가 상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20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IT업계에서도 변화의 징후는 감지된다. 과거 IT업계가 양적인 팽창을 위해 숙련 기술자를 양산하는데 주력했다면 미래에는 양보다 질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IT인의 정체성 확립이 요구된다.
냉정히 따져볼 때 지난 3∼4년간 국내 IT업계는 변화의 속도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으며 그 속에서 IT인의 정체성이라 할 만한 ‘내용’을 채우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벤처 열풍이 불면서 테헤란로에는 ‘젊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니고 튀는 복장을 한’ 엔지니어들이 활보했지만 그들을 연계할 만한 정체성의 고리는 부재했다.
‘IT인이 어떤 특성을 갖춰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현재 사회에서 어떤 특성을 지닌 인물을 요구하는가를 엿봄으로써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례는 인력 채용 성향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하반기 들어 신규 인력을 채용하는 대기업들은 그동안 당장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경력사원을 선호했던 경향에서 탈피, 신규 대졸사원의 채용폭을 넓혔다.
“최근 기업들은 입사 즉시 업무를 개시할 수 있는 경력사원도 필요하지만 다재다능한 기능과 개방적인 마인드를 갖춘 신규 인력들을 채용하는 것도 장점이 많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느 리크루트 기업 관계자의 설명처럼 기업의 인력 채용 문화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간과해서 안될 것은 IT산업이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이때 단순히 외국어 실력 등 피상적인 요구 조건만을 부르짖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기업 문화가 변함에 따라 IT인의 정체성은 대대적인 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월드컵의 열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직후 자주 접했던 단어 중 하나가 ‘멀티플레이어’다.
기업 CEO들을 열광케 했던 히딩크식 경영의 핵심요소라 할 수 있는 인력의 멀티플레이어화는 IT업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자신의 전공 분야만을 고집하는 외곬 성향은 예전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전문 분야 하나쯤은 반드시 개척하되 언제든지 다양한 부문에서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멀티플레이어란 단순히 모든 방면의 지식을 갖춘 팔방미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한 눈을 팔아도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든 IT시장에서 슈퍼맨이 되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20년을 이끌 IT인은 기업 내에서 어느 위치에 있든 유연한 인간관계를 형성해나갈 줄 아는 동시에 신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는 열린 성향을 지닌 인간이다.
기업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내가 CEO’라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동안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은 물론 기업인들은 자유로운 토론문화의 부재와 ‘나서는 사람이 피해보기 십상’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 적극적인 의사 표현조차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개인이 직접 아이디어를 찾아나서고 이를 기업의 발전으로 연계시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개인의 감성 훈련도 필수적이다. 딱딱한 기술이 지배해온 IT업계에서 최근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창의력이 넘쳐나는 인재들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독창적인 신기술 및 마케팅 방안으로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벤처기업들은 하나같이 똑똑한 인물보다 튀는 인물의 가치에 주목해왔다. 아이디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미래 IT업계에서 지식과 창의력을 겸비한 인물의 역할은 점점 커질 것이다.
외형적으로 성장을 거듭한 기업이라면 기업인이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해서도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다. 90년대 후반 불어닥친 닷컴 열풍과 기업들의 몸집 부풀리기로 인한 거품이 서서히 빠지고 있는 이때 위에서 언급한 덕목들을 어느 정도 소화해낼 수 있는지 점검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도덕성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되기보다 새로운 IT 인간상을 창조해내는 작업을 기업들이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외형 성장에만 집착해 정체성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기업들로서는 사실 이제부터가 새로운 출발점인 셈이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벤처기업의 정체성 찾기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주시해야 할 현상이다. 99년부터 우후죽순격으로 설립된 수많은 벤처기업들은 닷컴 열풍이 제거되기 시작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문을 닫아야만 했던 기업들은 청산 이후의 진로를 찾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설령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 역시 기업을 이끄는 사원들은 예전과 달라진 IT환경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서성이는 모습이다.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기업과 기업인들은 현재 상황에서 문제점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처음부터 새로운 IT인의 상을 정립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때다. 기업의 CEO들은 위에서 제기한 요구조건들을 충족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기업이 향후 10년 내지 20년간 어떤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인지 진지한 토론을 벌여야 할 것이다.
IT인의 정체성 확립 문제에 대해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IT인의 범주가 어디까지고 벤처기업의 상이 어떠해야 했는지에 대한 논의조차 부재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특히 정부 차원에서는 사업을 포기하는 벤처기업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주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70년대 말 정부의 중소기업지원책이 현재의 벤처육성책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은 반성해야 할 대목”이라며 “IT인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도 일회적이고 말초적인 대응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인력 재활용을 비롯해 기업인이 장기적으로 비전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거시적 정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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