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IT벤처정책연구센터장 이인찬
벤처거품이 우리사회를 휘감았을 때 이루어졌던 비합리적이며 불법적인 투자와 마케팅 활동 등이 다양한 정치, 사회적 부조리와 얽히면서 소위 벤처비리가 속출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은 지금, 벤처기업과 시장 그리고 정부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러한 비합리적 불법투자가 가능했던 구조적인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벤처는 본질적으로 높은 불확실성과 정보 비대칭성을 갖고 있어서 관련시장이 불안정하기 쉬우며 정보의 유무에 따른 기회주의적 행동의 가능성이 높은 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참여자들은 이러한 벤처시장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벤처붐에 편승, 무분별하게 벤처투자를 감행했다.
일부 비도덕적 인사들은 이러한 경제·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벤처육성정책 및 과열된 투자분위기를 악용했다. 시장은 폭발적으로 커졌으나 제도적으로 이러한 기회주의적 행동을 제어할 만한 감시체계는 갖추지 못했다. 시장이 압축 성장하면서 시장의 덩치에 비해 질이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무분별한 투자는 벤처기업을 선별(screening)하고, 평가(evaluating)하고, 감시(monitoring)하는 기능의 일부를 시장이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분별한 투자가 사회적 벤처비리로 확대된 것은 시장이 아닌 정부가 시장기능의 일부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장에 깊게 관여하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옳지 않은 유인으로 자원배분에 깊게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벤처비리를 통해 시장은 벤처산업이 불확실성이 높고 잠재적으로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가 심각한 산업이며 정부가 좋고 나쁨을 선택할 수 없는 산업이고, 정부가 시장에 깊게 개입하면서 비시장적 자원배분(뇌물, 로비 등)이 불가피하게 나타나고, 이는 사회적 부조리와 불가피하게 얽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벤처비리 때문에 정부가 벤처기업의 ‘옥석가리기에 더욱 철저해지겠다’는 것은 ‘사후약방문’인 성격이 강하며 효과도 없는 미봉책일 수 있다. 정부가 사전적, 사후적으로 아무리 철저하게 지원대상을 거르더라도 ‘정부의 옥석가리기’는 ‘시장의 옥석가리기’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정부가 옥석을 가릴 때 나타날 수 있는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라는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최근의 벤처비리 사태로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정부가 벤처기업을 직접 고르고 지원하면 시장이 우수한 벤처기업을 골라야 하는 노력을 저하시키고 시장기능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벤처비리를 계기로 벤처정책 기조를 본질적으로 재검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벤처관련 정책의 성과는 등록된 벤처기업의 수나 코스닥시장의 지수로 평가되지 않는다. 벤처정책의 성과는 효율적인 벤처시장 시스템이 우리 경제에 굳건히 자리잡는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그러나 효율적 시장시스템은 단기간에 형성,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시장참여자의 지식과 경험을 통한 학습을 통해서 효율적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이러한 학습은 오랜 기간을 두고 꾸준히 이루어진다.
벤처확인제도에 기초한 정부의 벤처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벤처캐피털, 코스닥시장 등 벤처관련 시장이 짧은 기간동안 급속히 성장했고 발전하고 있는 것은 벤처확인제도를 비롯한 정부의 다양한 정책적 노력의 결실이다. 벤처관련 시장은 급성장 후 조정과정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조정을 통해 효율적 자원배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시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시장진화 단계에 따라 정부의 역할은 새롭게 설정되게 마련이다. 벤처관련 시장시스템이 형성된 후 발전하는 환경에서 벤처기업의 성장은 개별기업의 몫이다. 시장이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가는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의 질을 평가하는 벤처정책 기조는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벤처부문에 대한 각종 시장개입과 규제를 어떻게 제거하고, 시장참여자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 및 제도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정부는 ‘더욱 철저한 옥석가리기’보다는 정부가 아닌 시장이 우수한 벤처기업을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유인하는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iclee@kisd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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