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코리안 신화의 주역’ ‘한국인 벤처사업가의 대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미 컴퓨터업계의 실력자,’
모두 미국내 대표적인 한인 벤처기업가인 이종문 암벡스그룹 회장(74)을 이르는 말이다.
마른 체격에 70대 중반에 들어선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노신사이지만 그의 행동과 다소 느린 말투 한마디 한마디는 거대한 바위같은 중후한 무게감이 배어난다.
충남 당진 출신인 그는 최근 대전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찾았다. 50여년만의 금의환향인 셈이다.
“와서 보고 놀랐습니다. KAIST의 시설과 인재에 정부투자가 엄청나다는 것과 대전은 물론 충남도까지 벤처 비지니스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단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중국 베이징은 길하나를 두고 대학과 벤처기업이 상당히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일본도 벤처 육성을 하고 있지만 이런 시설과 규모의 벤처중심은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 벤처성공신화로 불리는 그가 한국의 벤처 집적시설을 둘러보고 내놓은 첫 평가이다.
한국 종근당 이종근 회장의 친동생이기도 한 그가 한국 땅을 등지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지난 56년의 일이다. 그의 나이 만 28세 때이다. 이후 골프채 수출에서부터 IT사업까지 안해본 사업이 없을 정도다. 물론 대부분의 사업이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지난 70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손대는 사업마다 모두 성공시키면서 그의 손은 날고 기는 사업가들이 즐비한 미국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그의 화려한 성공뒤에 가려져 있다. 친구의 조언으로 82년 손을 댄 컴퓨터 카드 사업이 제품 개발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뒤 가정마저 파단지경에 이르자 이 회장은 세번에 걸쳐 권총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을 마련해준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지난 89년 개발한 그래픽카드이다. 이때부터 그가 이끌던 회사의 매출이 급상승하며 여기에서만 모두 4억60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32년을 그렇게 실리콘밸리에서만 지내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가진 인맥과 보고 배운 것을 은퇴하기전에 어디, 누구에겐가는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 후배들은 저같이 고생하지 않고 빨리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이기에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한국인의 정과 동포애에 약한 휴머니스트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일화 한토막.
“한국기업은 아니지만 한국사람들이 하는 기업 3곳에 투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한 곳에 200만달러를 펀딩했는데 잘 안되는 바람에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그날 새벽 2시 반쯤 되었나, 잠을 깼는데 갑작스레 KAIST와 서울대 출신 직원, 한국인 부부박사 등이 떠올랐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노동비자로는 다른 기업에 재취업을 어렵게 규제하고 있어 모두 귀국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미국에 건너왔는데 도저히 그렇게 허무하게 돌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새벽에 나가 폐업을 취소하고 현재까지 540만달러나 더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잘되고 있습니다.”
장사꾼같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에게는 남다른 벤처 철학이 있다.
벤처기업들이 아이디어와 컨셉,그리고 창의력을 가지고 창업할 때 예를 들어 한알이 씨앗이라면 수분이 있는 땅에 떨어져야 하고 기후나 영양조건이 맞아야 싹이 나고 자라듯 생태계가 갖추어져야 뿌리가 잘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벤처 생태계론을 강조한다.
그는 기후나 환경조건에 따라 국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실리콘밸리와 우리나라의 상황을 접목시켜 하이브리드(잡종)된 열매를 맺는 나무를 키울 수 있는 것 부터 적용해 나가야 한다고 특유의 잡종 생태계론을 주장한다.
국내 투자를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그는 또 나름의 지론을 갖고 있다.
“한번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는데 당분간 국내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랬죠. 국내에서 이곳저곳 투자하면 돈벌러 다닌다는 말이 나올 것이고 잡음이 많이 일 것입니다. 차라리 한국에 투자할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생활 철학을 볼 수 있는 단면이다.
남의 돈 가지고는 사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또다른 지론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아이디어와 사업만 좋으면 벤처 캐피털들이 늘어서지만 언제나 유지하는 공식이 있다. 예를 들어 벤처기업이 300만달러 정도를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유치 받으려면 250만달러를 먼저 유치하고 나서 전화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이같은 원칙은 그도 철저히 지킨다.
또 사업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난 뒤 될듯말듯 하면 매출이 어느정도 나오면 다시 찾아오라는 것이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들의 철학이라고 그는 강한 어조로 말하며 한국 벤처캐피털들의 생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돈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자금만 유치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회사가 실수하지 않도록 경영에 간섭, 효율적으로 빨리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캐피털의 역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부가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부가가치를 캐피털들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벤처캐피털들이 성공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막 꽃을 피우려하는 한국의 벤처기업들에게 단호하게 충고했다.
“글로벌 마켓을 보고 비지니스하는 벤처기업들이 한국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컨셉트 좋고 기술도 좋아 어느정도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이 드는 기업이 경영자의 능력부족으로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한국의 벤처기업들은 간섭을 못견딥니다. 우리나라 젊은이 다음으로 간섭을 못견디는 국가는 일본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베트남이나 인도가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장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며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남의 것을 벤처마킹하며 지금까지는 버텨왔지만 이것마저 직원들의 스트라이크로 생산코스트가 올라가 국제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암벡스 그룹이 실리콘밸리에서 26개 기업에 투자했다며 다시한번 남의 돈으로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실리콘밸리도 지난 1년간 경기의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백화점식으로 투자를 늘어놓은 캐피털들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며 몇곳을 선택, 기업에 깊이 관여한 캐피털들만 살아남았다고 국내 캐피털들에 대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근래에 들어 그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에 1500만달러를 기증한 것에 이어 고려대에 100만달러를 쾌척하는 등 재산의 사회환원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다.
요즘엔 우리 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 김옥균 묘소를 찾아 참배했던 그는 우리나라 1850년 이후 일본에 한일합방될 때까지의 한국 근대사가 모두 야당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팩트(사실)중심으로 재정리 해야겠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다.
그는 또 KAIST에 자신의 업적과 경륜 및 비젼을 기리고 KAIST내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벤처 기업가와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이종문 엔터프레너쉽 센터’설립에 적극 협조키로 하는 등 이곳에 그의 남은 인생의 일부를 투자, 공을 들일 생각이다.
한편 KAIST는 이 회장을 명예석좌교수로 위촉, 올해부터 봄,가을학기로 나눠 ‘기업가 정신’에 대한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키로 했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kr>
△28년 충남 당진 출생 △54년 중앙대 법대 졸 △58년 조지피바디대 도서관학 석사 △63∼70년 종근당 제약 상무 △82년 다이아몬드컴퓨터시스템스 설립 △88년 IBM과 애플컴퓨터의 호환시스템 ‘트랙스타’ 개발 △95년 이종문재단 설립 △96년 암벡스벤처그룹 설립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현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자문교수, 미국 PECC 이사회 부이사장, 미국-아시아 IT정상회의 의장, 암벡스벤처그룹 회장, 산호세 기술혁신 박물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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