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37)최초의 서양인 통신기술자 미륜사(Ⅴ)

 1896년 6월 11일자 독립신문에는 ‘덴마크 사람 미륜사를 고립(雇立)하여 정부의 전신일을 보게 하고 전신학도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보도내용과 같이 미륜사는 전보요원 양성을 위해 교과를 직접 담당하고, 전신업무 전반에 걸친 지도와 자문을 수행하기 위한 전보교사로 다시 조선에서 살아가게 된다. 월봉 100원이었다.

 미륜사는 1899년 6월 29일, 1900년 6월 25일, 1902년 7월 2일, 1904년 7월 1일 등 4회에 걸쳐 연속계약이 체결되어 1905년 통신기관이 일본에 침탈당함에 따라 파면될 때까지 9년간을 조선정부 직원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정보통신사업 발전에 기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 가설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통신기술자 미륜사는 조선 젊은이들의 정보통신 기술과 사업에 대한 교육뿐만이 아니라, 힘을 앞세운 일본의 통신권 피탈과 침략에 대항하여 조선의 통신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여러가지 형태의 전선가설과 요금협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그 중 하나가 운산광산의 전신선 가설에 대한 사항이다.

 1899년 9월 운산에서 북진(北鎭)에 이르는 전선이 가설되었다. 운산광산을 운영하고 있던 미국이 광산과 인천간 전신소통을 위해 전선가설을 요청한 것이었다. 미륜사는 이 협상에서 가설하는 전선이 오로지 미국의 광산만을 위한 특수시설임을 지적하고, 우선 5개년 기한으로 운산, 박천, 평양, 진남포, 인천간에서 운산광산의 업무관계로 수발하는 일체의 전보는 모두 면비하는 대신, 전보통수의 다과에 불문하고 매월 200원씩 총 2400원의 보비를 연 2회 분납하게끔 약정을 변경하여 시행하게 했다. 이를 통해 전보통화 수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는 현재의 ‘전용회선’의 최초 사례가 된다.

 미륜사는 이러한 조선의 전신사업 발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899년 12월 9일 서품의 은전을 받았다. 특수삼품옥장(特授三品玉章)으로, 통정대부이며 각부의 참의에게 부여되는 봉임관 최고의 품계였다.

 이러한 현저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미륜사에 대한 대우는 조선정부에 고빙된 외국인 중에서 제일 나쁘다는 지적을 받았다. 지금의 대학교수 수준의 대우로 통신원 총판의 명령과 서무국장의 지휘를 받으며 전보학도의 교육, 전보사 공정에 대한 기술 지도 및 해외보비(海外報費)의 조절과 장악, 그리고 정보통신사업에 대한 계획 상신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그 대우는 수 차례에 걸친 인상에도 불구하고 최종계약에서 주택비 250원을 포함하여 연봉 3600원에 불과했다. 미륜사의 보수는 같은 통신원에 고빙되었던 우체교사 길맹세에 비해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외교 경로를 통한 항의가 계속되기도 했다.

 1900년 5월 31일에는 그해 4월 14일에 각 전보사장에 시달한 집무유의사항에 미륜사의 의견이 추가로 수렴되어 수정된 후 17개 항의 훈령으로 재차 시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전신고문관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01년 11월 11일에는 법규교정소의 의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1월 22일에는 외부서리 고문관으로, 1902년 3월 1일에는 농상공부 연해검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02년 12월 2일에는 일제의 전화전장권 철폐를 완강히 요구하였으나, 억지와 조선정부에서 요구한 실태 해명에 불응한 일본측의 불성실한 태도로 실무자 교섭이 무산된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 당시에는 앞서 밝힌대로 일본의 야비한 전보횡취를 통하여 통신연락을 두절시킨 뒤 인천 앞 바다에서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의 전함 코데스호와 와리야크호 등을 침몰시켜 버린 일본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미륜사의 일본에 대한 미움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미륜사를 미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륜사는 당시 고빙되었던 외국인 대부분이 일본인이거나 기타 외국인들도 일본인이 추천했거나 그들에게 아부하는 자만이 그 자리를 유지한 것과는 달리 계속 유임되었다. 또한 아관파천 시기에 반일정권 때에도 계속 고빙되었고, 그 후 다시 일본세력이 대두된 뒤에도 계속 유임되었다. 이는 탁월한 기술과 조야의 두터운 신임 때문이었다. 고액의 연봉을 받은 우체교사 길맹세가 일본이 통신기관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일본측에 비밀 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배임행위를 하여 오히려 중후한 대우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05년 조선의 통신권이 일본에 침탈당하면서 미륜사는 파면당하고 말았다. 길맹세는 의원해임. 그때 귀국비와 상여금 문제가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길맹세에게는 동년 3월 2일에 상여금과 귀국여비로 3150원을 예비비 중에서 지출키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미륜사도 동월 20일께부터 법국공사를 통하여 길맹세와 같이 귀국비를 요구하였으나 교섭이 여의치 않았다. 1905년 5월 22일에 법국공사는 미륜사의 노임도 길맹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니, 상여금 1950원을 같이 지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동년 8월 22일에 미륜사 공로가 매우 컸음을 인정하였으나 상여금은 지불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통신기술자 미륜사.

 일본의 압력에 의해 파면을 당한 후에도 미륜사는 조선을 떠나지 못했다. 조선의 땅과 하늘, 태양이 좋았다. 산이 좋았다. 그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가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침략당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미륜사는 조선이 차례차례 일본의 손아귀로 빠져드는 것을 가슴아프게 바라보며 서대문 부근에서 무역업과 과수원을 운영했다.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그 여인이었지만 자신의 신병치료를 명분으로 가끔씩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자신의 병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여인을 만날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었다.

 1915년 2월 17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대문 밖 팔각정 부근에 자리한 넓은 과수원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과수원 안쪽에 아담하게 자리한 붉은 벽돌집의 기와 지붕과 잘 다듬어진 정원의 감나무 가지 위로 그 겨울의 마지막인 듯한 함박눈이 하염없이 쏟아져 쌓이고 있었다.

 회색 하늘에 까만 점들이 하나씩 커져 하얗게 땅위로 내리는 눈.

 외벽과 마찬가지로 붉은 벽돌로 된 거실에서 미륜사가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의 예순이 다 되어 가는 나이. 불이 관 장작 난로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난로 옆으로는 결 좋은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 여인이 약을 가지고 오는 날이었다. 그 여인을 떠올릴 때마다 미륜사는 자신의 혼을 흔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거문고 소리였다.

 감나무 가지 위에 쌓인 눈이 부서져 내렸다. 오늘도 그 여인에게 전달할 것이 있었다. 군자금이었다. 그 여인의 장성한 아들. 그 여인의 아들은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미륜사는 그 청년을 통해 군자금을 대 주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집 뒤편으로 다가들었다. 이어 눈 내리는 하늘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미륜사를 미행하던 자였다. 미륜사는 쓰러지면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으로 들어와 생활한 긴 세월을 떠올렸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었다.

 1915년 2월 19일자 매일신보에 미륜사의 죽음이 보도되었다. ‘서대문 밖에 사는 덴마크 사람 미륜사가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여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미륜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인 정보통신 기술자 미륜사는 30년간 조선 땅에서 조선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서편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고, 지금도 그곳에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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