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과 인천·부산을 잇는 전신선의 개설에 이어 1891년 6월에는 한성에서 춘천을 경유, 원산에 이르는 북로전선(北路電線)이 개설되었다. 이에 앞서 공주·청주간 지선(支線)과 한성·동칠릉(東七陵)간 전선이 개통되기도 하였지만, 북로전선은 크게 보아 세번째로 한반도에 가설된 기간통신망이었다.
북로전선은 남로전선과 마찬가지로 조선전보총국에서 가설하고 운영을 담당하였는데, 조선정부가 외국세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가설됐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북로전선의 가설계획은 1888년 초 조선정부의 외부 고문이었던 데니(O.N.Denny·德尼)가 주도하여 추진되었다. 남로전선의 완공이 얼마 남지 않은 1888년 2월, 부산과 한성의 전신선을 다시 연장하여 함경도에 이르는 육선(陸線)을 가설하고 이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접속시킬 것을 비밀리에 계획하고 추진한 것이었다.
‘북로전선이 가설되면 일본 및 상하이 등지에서 구미 방면으로 발송되는 전신은 인도(印度) 방면을 우회하지 않고 이 선로를 이용하게 될 것이며, 또 일본 및 상하이와 해삼위(海蔘威) 간에도 해저전선(대북부전신회사 경영)이 없지 않으나 해저선은 육선보다 요금이 비싸므로 역시 북로전선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북로전선이 완성되면 조선의 전신망은 동양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 이익도 막대할 것이다. 더욱이 북로전선이 개설되면 조선의 독립을 해하는 혐의마저 없지 않은 중국이 운영하는 한성전보총국 관할하의 서로전선은 자연히 소멸될 것이다.’
‘조선의 전신망은 동양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 이익도 막대할 것이다.’
북로전선을 추진하던 조선정부의 시각으로, 당시 정보통신의 중요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 있다. 하지만 중국·일본과 러시아 등 주변국에서는 조선정부의 의도대로 전선가설을 추진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정부는 1891년 2월 15일 청국과 ‘원선합동(元線合同)’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약을 체결하고 전선의 가설을 시작했다.
북로전선의 가설은 조약체결 이전에 이미 상당한 준비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착공할 수 있었다. 조약이 체결된 7일 후 통서독판은 공사착공과 그 추진을 조선전보총국에 시달하였고, 4월 2일에는 원산·춘천분국이 설치되었으며, 6월 20일에는 원산까지의 전선가설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장마가 심하여 공사진행에는 의외의 지장이 많았다. 이로 인해 함흥까지의 전선가설은 가을로 미루고 우선 한성과 원산간 전신업무를 1891년 6월 25일부터 개시했다. 이때 가설된 전신선로는 한성·양주(경기도)·춘천·낭주·금성·회양(淮陽-강원도)을 거쳐 안변·덕원(함경도)에 이르는 것이었다.
북로전선이 원산과 함흥간 공정을 마무리짓지 못하여 러시아와 전신선이 연접되지 못한 사유로 기록에서는 장마가 심하여 공사진행에 어려움이 많아 잠시 가을까지 미룬다고 하였지만, 조선정부의 러시아 접근을 경계하던 중국이나 일본의 압력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미륜사의 행적은 당시 기록에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이 청국의 한성전보총국 소속으로 조선정부측의 편을 들을 수도 없고, 청국측의 입장을 대변하기에도 번거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미륜사에 관한 기록은 1894년 전라도 지방에서 대규모로 발생한 동학 농민봉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나타난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들의 봉기는 폐정개혁을 부르짖으며 노도와 같이 전국으로 번졌다.
‘전보(電報)는 다폐민문(多廢民問)하니 철파(撤罷)할 사(事)’
동학 농민군들이 조선정부에 대해 화해조건으로 내세운 폐정개혁 요구사항 중 일곱번째로 제시한 내용이다. 정보통신의 유리무해한 특성이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보의 철폐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동학 농민군들은 전신시설이 그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됐다는 불신과 전선의 가설에 따른 전주의 공출, 부역 등으로 민폐가 심했던 당시 상황을 봉기에 대한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했다. 전보는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관용과 군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로 동학 농민군은 전신시설을 닥치는 대로 무차별하게 파괴했다.
조선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자력으로 진압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고, 청국군은 1894년 5월 2일 아산만에 상륙했다. 이어 때를 기다리던 일본도 만여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동학 농민군들의 봉기가 소강상태에 이른 것과는 별도로 서로 대치하게 된 청국군과 일본군은 통신시설 확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청국군은 가설된 지 10년이 지나 전주의 훼손이 심한 서로전선의 복구 수리를 조선정부에서 각별히 추진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보수공사와는 별도로 아산에 주둔한 청국군대와 한성과의 통신을 위해 천안의 전보분국 설치를 요청하고, 한성전보총국의 기술진을 활용해 남로전선의 아산지선을 가설하여 군용으로 사용키로 했다. 그때 미륜사가 그 공사의 기술감독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894년 6월이었다.
미륜사의 작업으로 청국군은 주둔하고 있던 아산지역에서 한성은 물론, 평양·청국과 직접 통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사를 끝내고 천안 전보분국에 들러 근황을 한성전보총국으로 알리고 자신이 가설한 아산만까지의 전신선을 점검할 때 미륜사는 아산만으로 가설된 전선에 또 다른 전선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보통신의 시설을 운영하다보면 감각적인 면도 많이 작용한다. 직접 오랫동안 운영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을 미륜사는 가지고 있었다. 이론이 아니다. 오랜 경험 끝에 얻어지는 능력이었다. 일본군이 청국 주둔군과 청국 정부와의 전보내용을 몰래 확보하기 위해 아산만 쪽 전신선 중간에 그들의 도청장치를 달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미륜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 가설한 전신을 거꾸로 점검하여 도청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신선에 직접 연결했을 경우 발생하는 계전기의 동작 방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도청장치를 병렬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조선과 청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도청장치였다.
미륜사가 일본군이 설치한 도청장치를 철거하고 한창 진행중인 전투현장을 우회하여 한성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한성전보총국은 철수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미륜사는 철수하면서 한성전보총국 건물 밖으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인천에서 인입되는 전선을 절단하여 의주로 가는 전선에 연접해 놓고 그 도청장치를 접속점에 연결했다. 이후 일본군이 그 전선을 사용하게 될 때 그들의 통신내용을 철수하면서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작업이었다.
미륜사는 이 사건으로 후에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중국으로 철수한 후 산둥반도 웨이하이 전신국에서 근무하다 그곳까지 진출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의 사세보까지 끌려가는 수난을 감수해야 했다. 미륜사가 그 동안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와 청일전쟁 당시 설치한 도청장치가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미륜사는 감옥에서 앞으로 일본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 나왔다.
그러나 미륜사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자신이 설치한 도청장치를 통해 동학 농민군을 도와주던 그 여인의 남편이 일본군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륜사는 독일 공사를 통하여 조선정부에 전무교사로 근무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조선정부는 전보학습원 양성과 더불어 그들의 교과를 직접 담당하고 전신업무 전반에 걸친 지도와 자문을 얻기 위해 그를 정식으로 농상공부 전무교사로 초빙했다. 1896년 6월의 일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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