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니스 인근의 앙티폴리스에 있는 소피아과학단지의 경우 AT&T, 알카텔, IBM 등 유수의 IT기업들은 물론 수많은 전문 반도체설계회사들의 연구개발센터가 입주해 있다.
이곳에 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오스트리아 칩설계업체 뉴로직사의 한 관계자는 “본사 직원들은 휴양지인 이곳에서 일하기를 원하며 이곳만큼 좋은 인재를 뽑기 좋은 곳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소는 시장과 인력만 풍부하다면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은 지리적으로 세계 IT산업의 연구개발 거점으로 잠재력이 있는 지역이다.
자체 시장 규모는 작지만 세계 최대인 중국에 가장 인접해 있으며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대만, 일본 등의 우수 인력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IT산업의 핵심 부품인 칩과 디스플레이의 연구 거점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두 분야의 세계적인 생산기지가 바로 한국이기 때문이다.
기흥과 화성, 이천, 청주, 온양 등 중부권은 이미 대규모 반도체공장과 연구소가 들어서 실리콘밸리를 형성했다. 천안을 기점으로 구미와 부산에는 세계적인 TFT LCD 및 브라운관 공장이 있다.
여기에 용인, 수원, 기흥, 안양 등지엔 디스플레이업체들의 연구소가 밀집해 있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가전, 통신, PC 등 시스템업체들이 어김없이 자리했다. 이를 연결하면 우리 경제를 뒷받침하는 실리 크리스털 벨트가 형성된다.
반도체 강국 미국이나 디스플레이 강국 일본도 한국처럼 생산공장과 연구시설, 그리고 시스템업체가 밀집한 곳은 없다.
우리만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대한 연구개발 여건이 좋은 나라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 세계적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의 연구소가 단 한 곳도 없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력과 언어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를 구하기 힘들다. 인근 일본과 대만, 중국 인력의 유입도 불가능한 지역이다. 한국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두는 게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한다.
아직은 중국의 연구개발 인프라가 미약해 중국에 연구소를 세운 기업들은 많지 않으나 몇년 뒤엔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산업의 거의 유일한 대안은 연구개발 중심지로 남는 것인데 이마저 중국에 빼앗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희망이 없다. 서두를 필요가 있다. 우선 국내 업체만으로도 활발한 연구개발 기반을 갖출 필요가 있다. 같은 지역에 생산공장과 연구소가 밀집해 있으나 서로 다른 회사라는 이유로 교류가 미흡하다. 시너지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 ‘해결사’는 대학과 벤처기업이다.
연구개발의 허파 구실을 하는 대학은 기초기술 연구를 비롯해 양질의 인력을 양성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에 공급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벤처기업들은 각각 대기업이 직접 할 수 없는 분야를 집중 개발해 연대할 경우 산업의 저변은 크게 넓어질 수 있다.
최근 삼성전자 비메모리반도체 부문이 국내 설계업체들과 파트너십을 갖고 공동 사업을 펼쳐나가기로 한 것은 다소 늦기는 했지만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산공장과 연구소, 대학, 벤처기업들이 한 데 뭉쳐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내놓을 때 한국은 생산이 아닌 연구개발센터로 등장할 수 있다. 부르지 않아도 외국 기업의 연구소들이 몰려오게 된다.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연구소에 대한 각종 세제 혜택을 비롯한 정책적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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