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장마 끝에 날씨가 무덥기만 하다.
LG강남타워 집무실에서 만난 LG텔레콤 남용 사장은 그간 진행된 하나로통신과의 지루한 협상 과정, 정통부와의 조율, 후발사업자 컨소시엄 참여 설득, LG그룹 내의 이견조정 과정에서 발생했을 피곤함조차 아예 잊은 듯한 시원한 표정이었다. LG그룹이 비동기식 사업권에서 탈락한 지난해 12월 당시의 침울하고 걱정스런 표정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토론식 대화를 즐기는 그답게 처음부터 기자의 소감을 유도했지만 기자의 소감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몇 차례 만났지만 늘 남 사장은 이런 식이었다.
“꽉 막혀 있던 체증이 내려간 것 같습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그룹 CEO의 한 사람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물론 앞으로 남은 일이 더 많지만요. 그런데 기자가 보시기에는 어떤지요.”
지난해 말 LG그룹이 비동기식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후 처음 가진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이와 비슷한 화법을 구사했다. “오늘은 이야기를 들으러 나왔습니다. 제가 대신 취재 좀 하면 안될까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동기식에 대한 사업성, LG텔레콤의 미래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당시 4시간 넘도록 남 사장의 눈에는 결의가 보였고 간간이 LG그룹 내 CEO로서의 고뇌와 갈등을 곁눈질할 수 있었다.
그후 두어 번 더 이뤄진 인터뷰에서 남 사장은 ‘아직은 할 말이 없기 때문에’ ‘협상 중이기 때문에’라며 기자를 대상으로 취재 혹은 취조를 했다.
결국 기자가 본 LG텔레콤 주도의 동기식 IMT2000컨소시엄 구성과 정통부의 사업자 선정 계획에 대한 소회를 대략 이야기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가장 어려운 때는 그룹이 비동기식 사업권에서 떨어진 직후였습니다. 그룹 내부에서 LG텔레콤에 대한 수익성 여부 논란이 일면서 통신사업 정리론이 대두됐을 때였습니다. 이견을 정리하고 그룹 내에서 통신사업의 위상을 다시 강화하던 3월까지 정말 힘들었습니다.”
남 사장이 말하는 당시 사정은 이렇다.
비동기 사업권 탈락 이후 15일마다 한 번씩 열리던 그룹 내 통신전략회의에서 LG텔레콤 등 통신사업부문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됐다는 것이다.
남 사장은 동기식은 사업성이 없으니 IMT2000사업을 포기하고 그룹의 역량을 한 곳으로 집결하자는 그룹 의견에 대해 설득에 나섰다. 그는 LG텔레콤이 동기식 사업권을 따낼 경우 시너지 효과 등 사업 비전을 재정립해 3월 극적으로 의견조율을 마쳤다.
이 과정에서 사업성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 동기식 사업권이 예상 외로 비동기식에 비해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동기식의 경쟁력은 비동기식에 비해 2·3세대 로밍, 네트워크의 확장성, 비용, 마케팅 측면에서 유리한 부문이 많습니다. 그 점을 발견하게 된 거죠. 처음부터 동기식에 대한 가능성은 있다고 봤지만 생각보다 많은 경쟁 우위 요소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룹에서 이견 조정이 끝난 뒤 남 사장은 그룹으로부터 동기식 사업권 부문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남 사장은 외자유치, 컨소시엄 구성, 정통부와의 협상 시도 등 세 가지 카드를 뽑아들었다.
이미 정통부는 전임 안병엽 장관 시절부터 동기식사업자 선정을 위한 개략적인 계획을 만든 상태. 여기에 동기식 애찬론자인 양승택 장관이 취임하면서 정부와의 협상은 급진전됐다.
“막상 동기식 사업권에 대한 그룹 내 협상을 담당하다 보니 한꺼번에 모든 일이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TIW와 BT간의 LG텔레콤 지분협상, 해외 사업자에 대한 LG텔레콤 동기식 IMT2000에 대한 비전 제시, 정통부와의 의견 조율, 동기식사업에 대한 비즈니스모델 재설정 작업 등이 병행됐습니다.”
정통부가 가진 동기식 IMT2000에 대한 사업 의지는 확고했다.
남 사장은 출연금에 대한 실질적인 경감 조치, LG텔레콤 주도의 컨소시엄 구성과 사전합병 등 다양한 동기식 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것도 CDMA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다지려는 정부 의지의 산물로 이해했다.
논란을 빚은 하나로통신과의 그랜드컨소시엄 구성 과정의 뒷얘기를 듣고 싶었다.
“하나로통신과의 협상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선 정부가 유도하는 통신시장 구조조정이라는 측면을 상호공감했습니다. 여기에 신윤식 사장께서 여러 쟁점 사항에 대해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남 사장은 하나로통신 신윤식 사장과 수차례 면담을 가지면서 서로가 갖고 있던 오해를 불식시켰다. 이미 통신시장의 3강구도 체제를 정립하자고 결론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양사는 무선은 LG텔레콤, 유선은 하나로통신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완결하고 향후 시장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봐가며 구체적인 ‘화학적 결합’을 유도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현재 동기식 IMT2000 그랜드컨소시엄에는 하나로통신·데이콤·두루넷 등 1000여개 회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고, 파워콤 역시 이사회를 통해 참여를 결정할 예정이다.
과연 이번 정통부의 동기식사업 계획 확정 과정에서 LG텔레콤이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남 사장의 답변은 간단했다. “비전을 얻었습니다. LG텔레콤 고객은 물론 직원·그룹 전체가 3세대 통신서비스를 실시할 수 있다는 비전을 얻은 셈입니다.”
남 사장이 말하는 비전은 ‘우리도 1등이 가능하다’는 것. 3세대가 도래한다면 비동기식사업자의 경우 전국망 구축에 3조원이 넘는 비용이 들어가지만 동기식사업자는 1조원 이내에서 투자를 완료할 수 있다는 것이 1등이 될 수 있는 공식이다. 투자비가 적고, 기존 2·3세대간 로밍, 단말기 및 시스템 기술이 이미 개발돼 있기 때문에 비동기식에 비해 빠르게 전국망 구축이 가능하다. 바로 이 점이 LG텔레콤이 가진 3세대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비동기식사업자에 비해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3세대 이동통신서비스를 구현할 경우 선두권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이 LG텔레콤의 비전이다.
“값싼 019, 안터지는 019는 3세대에서는 없습니다. 이미 3세대 망 구축에 들어간 셈이고 2003년 초면 전국 서비스가 가능합니다. 서비스 품질과 가격 면에서 다른 사업자에 비해 유리하기 때문에 3세대에서는 시장 판도 변화를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남 사장은 이제 LG텔레콤이 전세계 CDMA 이동통신시스템의 숙주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우리나라 CDMA 이동전화서비스를 3세대에도 유지하는 유일한 사업자기 때문이다.
그는 무협비디오 마니아다. 취미를 이야기할 때 무협비디오 감상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무협비디오에 관한 한 전문가다.
그는 앞으로 무협비디오 주인공처럼 통신시장 3강 구도의 한축을 담당할 수 있는 전략을 다시 구상할 것이다.
<김상룡기자 srkim@etnews.co.kr>
<약력>
△48년 경북 울진 출생 △67년 경동고 졸업 △76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76년 LG전자 입사 △89년 LG회장실 이사 △93년 LG VISION추진본부 상무 △96년 LG 경영혁신추진본부장 전무 △97년 LG 경영혁신추진본부·전략사업개발단 부사장 △98년 LG전자 멀티미디어사업본부 부사장 △98년 10월 LG텔레콤 대표이사 사장 △취미:골프·독서·무협비디오 감상 △가족:부인 임정희 여사와 1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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