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2)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년 12월 21일자에는 7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전보(電報)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신(電信)은 가장 신속(迅速)한 것이다. 세상에는 4가지 신속(神速)함이 있다는데 광(光)·영(影)·성(聲)·기(氣)가 그 것이다. 그러나 만리(萬里)에 달하는 빛과 그림자가 어디 있으며, 소리도 만리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기(氣)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데 전(電)이 즉 기다.”

전신의 원리가 되는 전기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 기사내용은 이어 전기의 원리, 발전방법, 전신의 방법, 육지와 바다의 선로가설 요령, 전보의 효용, 각국의 전신 현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전신은 전기를 이용하여 체계적인 통신방식을 수행한 첫번째 매체다. 음성은 전할 수 없지만 전기적 현상을 이용하여 미리 약정된 부호로 내용을 전하고, 그 부호를 미리 약속한 내용으로 다시 되살려 소식을 전달하는 매체였다. 현재는 그 활용성이 거의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전신의 발명은 획기적인 사건으로 각국에서는 서둘러 전신기술을 도입하거나 보급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보론’이 게재되기 전에도 한성순보에서는 매회 정보통신에 관련된 내용을 보도했다. 1883년 11월 1일자에 전기에 대한 기사가 실렸을 때에도 전신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고, 같은 해 11월 10일자에는 일본과 부산 간에 가설중이던 해저전선의 가설이 완료되었다는 기사가, 1884년 1월 11일자에는 새로운 전신법이 발명되어 1분에 2500자를 송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 중에서도 ‘전보론’이 실린 12월 21일자 신문에서 전보와 정보통신을 가장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소개하고 있는데, 기사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국이 부강의 기본이고, 개화의 근원으로 이를 다투어 설치하고 있다.’

부강(富强)의 기본, 개화(開化)의 근원.

한성순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개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 정보통신이라고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성순보는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정보통신은 정보와 통신이 결합된 말이다. 즉 일정한 형태로 정리된 자료를 정보라 하고, 그 정보를 원하는 곳으로 전달하는 것이 통신이다. 따라서 정보의 천이(遷移)를 통해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정보통신이 갖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신과 전화는 전기적 특성을 정보의 전달 수단으로 활용하는 기본적인 통신매체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한 순간에 필요한 정보를 멀리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롭게 여겨졌을 것이다. 며칠 씩, 몇 달씩 걸려야 하는 정보의 이동을 단 한순간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며, 그것이 설치되면 사회의 기본 틀이 바뀌는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그 활용여부에 따라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기본적 매체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나라의 군사력도 국력의 중요한 척도라고 할 때 그 군사력의 중요한 요소가 통신 수행능력이라고 본다면 고려시대부터 군사 통신용으로 활용되던 봉수통신망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신을 이용한 통신방식을 국가안보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며, 곧 나라를 지키는 기본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이 전신실에서 전투를 지휘한 것에서도 알 수 있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연합함대와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벌인 대한해협 해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의 이동과 작전 수행 상황을 무선 전신으로 신속하게 교환한 일본의 연합함대는 수신호로 작전을 수행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한마디로 박살내버렸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는 병사 5000명이 수장 당했고 6000명이 일본군 포로가 돼버렸으며, 38척의 군함 중 단 3척만이 남는 최악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 결정적 원인은 바로 전신의 활용이었다.

한편으로 개화, 즉 개혁을 통한 근대화는 다른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받아들인 문명이 전파되지 못한다면 그 의미는 축소되고 만다. 당시 전신을 이용한 통신은 개화를 바라는 세력에 의해 새로운 문물을 전파할 수 있는 보편적 언로를 확보할 수 있는 매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현대사회에서도 적용되어 한 나라의 국력과 민주화를 평가하는 척도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각 나라의 인구에 비례한 정보통신 시설과 이용수를 가지고 그 나라의 국력과 민주화 척도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신경으로 정보통신이 경제발전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사회, 모든 사건과 소식의 실시간적인 전파가 이루어지고 은폐가 불가능한 민주화된 사회는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 매체가 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지나나 99년 북한의 100명당 전화 가입자 수는 4.8회선이었다. 남한은 48회선. 전화 가입자 수만으로도 남한과 북한의 국력과 민주화의 척도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남한과 북한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매호 24면이 발행되었던 한성순보는 우정국 낙성식 연회에서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1884년 12월 4일, 분노한 군중들이 박문국을 습격하여 건물과 함께 신문을 만들던 활자와 인쇄시설 등을 불태워버려 폐간되고 말았다. 41호 신문이 발행되고 난 후였다.

여기서 한성순보 폐간의 원인이 되었던 갑신정변은 정보통신 역사의 또 다른 분기점이 된다. 정변을 진압한 청은 정변이 마무리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 시설인 서로전선(西路電線:1885년 가설된 인천과 서울·평양·의주·청을 연결한 전신선)을 주도하여 가설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청은 조선을 개화시키지 않고 계속 종속시키기 위한 정보통신 매체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만국이 전신 시설을 다투어 설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은 청의 주도 아래 우리 돈, 우리 땀, 우리 조상들을 모신 선산의 나무를 베어 가설된다. 우리 글은 보내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우리를 종속시키기 위한 청을 위한 매체로 우리 땅에 서둘러 가설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부강의 기본, 개화의 근원.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민주화의 근원이 되어 만국이 다투어 설치하고 있다는 당시 한성순보의 기사는 정보통신에 대한 특징과 가치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특히 문자에 의한 가공과 축적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보처리 능력과는 달리 컴퓨터를 활용한 정보의 가공과 축적이 이루어지고 전기는 물론 빛을 활용한 통신장치와 결합되면서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까지 대변하고 있다. 신문의 성격과는 별도로 현재 사회에서 정보통신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다투어 기술을 개발하고 설치를 서두르고 있는 정보통신 사업. 먼저 보고 먼저 판단하고 먼저 시행하는 정보통신 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가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100년도 더 지난 역사의 편린에서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된다.

김영근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 생활관 관장

한성순보는 1883년(고종 20년) 10월 30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근대신문의 효시(嚆矢)다. 10일 단위로 월 3회 발간되는 순간(旬刊) 형태로 서울 저동의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되었는데, 1882년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추진하여 탄생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박영효는 신문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진언하고, 한성판윤에 임명된 뒤 외무아문 박문국에 한성부 신문국을 설치하여 창간준비를 서둘렀다. 보수파 인사의 책동으로 박영효가 광주 유수로 좌천되자 일시 중단되었던 신문 발행사업은 6개월 후 한성판윤 김만식의 협조와 고종의 명으로 정부 내에 출판사업을 위한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일본에서 인쇄기계와 신문용지를 구입, 어렵게 창간이 이뤄졌다.

한성순보는 정부에서 간행되었기에 반은 관보적인 성격을 띠었고, 순한문으로 되었다는 것과 일본인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평이 좋지 못했다. 더구나 신문의 기사가 친일·반청적이었기에 당시 친청성향을 지닌 보수파 인사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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