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8회-韓·日 게임산업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은 저무는 용띠해가 아쉽다. 이처럼 행운이 따랐던 해는 없지 않았던가 싶다.

코스닥 시장에서 다음과 새롬에 버금가는 황제주로 부상, 누적회원 800만명 돌파와 게임업체 최초의 500억원 매출 달성 등 성적표가 화려했다.

김 사장이 특히 용띠해를 잊을 수 없는 것은 해외시장 진출의 성공이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여름 대만 온라인 게임시장에 진출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비결은 국내와 마찬가지로 대만에서도 PC방 문화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는 홍콩, 중국, 싱가포르 등지의 시장 공략의 청신호다.

김 사장은 이제 그 힘을 미국과 유럽, 그리고 게임의 본고장 일본 시장에도 뻗쳐 나갈 생각이다.

「미국과 유럽인들도 곧 온라인 게임을 즐기게 될 거야. 준비만 철저히 하면 세계 시장 정복은 문제없어.」

김택진 사장은 특유의 겸손함과는 거리가 먼 야망을 마음속 깊이 품어본다.

그는 대학시절 「아래아한글」을 개발할 때에도 한메소프트를 창업했을 때에도 이러한 꿈을 꿔보지 못했다.

「입지(立志)」인 97년에 엔씨소프트를 창업했을 때만 해도 세계 시장 공략은 막연한 기대였다. 이제는 눈앞에 다가왔다.

「글로벌화 하려면 먼저 합작사를 세워야 해. 또 확고한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가 있지. 우리가 제휴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차세대게임기 X박스를 출시할 하반기

가 좋은 때가 되겠군.」

김 사장은 지구촌 주민들이 PC 또는 게임기를 통해 리니지를 접속해 한자리에 모이는 그런 상상을 하며 모처럼 단꿈에 젖었다.

「이게 아닌데. 상황이 좋지 않아.」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 사장은 자꾸만 초조해졌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앞세운 소니의 공세가 더욱 거세어지는 데다 이제는 마이크로소프트까지 가세하고 있다.

다만 경쟁사인 세가엔터프라이즈가 경영난에 빠져 있어 다행이나 자체 활로 개척에 그다지 도움이 못될 듯하다.

50년 넘게 닌텐도를 운영해 왔으나 이러한 불안감은 처음이다.

인터넷과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이 둘은 게임시장에도 어김없이 밀고 들어와 게임기의 살아있는 신화 닌텐도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야마우치 사장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이렇게 급속도로 파고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업체들이 강세인 네트워크 게임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의외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나도 이젠 은퇴할 때가 됐는가.」 올해말께 은퇴하려던 야마우치 사장은 막상 그 시점이 다가오자 회한에 사로잡힌다.

「인터넷과 네트워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만 했어.」 그렇지만 이렇게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지금이라도 회사를 새롭게 탈바꿈시키지 않으면 멋지게 은퇴하려는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야마우치 사장은 한가닥 기대를 거는 것은 IBM과 마쓰시타와 제휴한 개발해 올 여름께 내놓을 새로운 128비트 게임기 「게임큐브」다.

인터넷과 네트워크 기능은 약하나 수 게임기능을 더욱 강화해 새로운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는 물론 소니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정상에 복귀한다는 전략이다.

적어도 휴대게임기를 1억대나 판매한 닌텐도는 소프트웨어만큼은 자신있다. 「게임기 시장의 성패는 뭐니뭐니 해도 소프트웨어에서 가름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낙관하는 야마우치 사장에게는 그러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고 있다.

아마도 혼자 힘으로 소니와 상대하기 힘들어진 현실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는 게임의 시대다.

지난 90년 세계 게임산업은 비디오게임, 아케이드게임, PC게임, 온라인게임 등을 합쳐 모두 195억달러였다.

9년 후인 1999년의 시장 규모는 1300억달러로 연평균 23.8% 성장했다. 영화, 음반 등 다른 대중문화산업의 연평균 성장률이 10% 미만인 것을 고려하면 무서운 속도다.

무엇보다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온라인게임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가상현실 기술과의 결합에 의한 미래 첨단산업으로 우뚝 서고 있다. 소니가 왜 플레이스테이션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겠는가.

지금까지 세계 게임산업을 주도한 것은 미국, 일본이다.

처음에는 미국이 주도했으나 대표주자인 아타리사가 소프트웨어 확대에 게을리하면서 82년 크리스마스를 고비로 일본에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른바 「아타리 쇼크」다.

이후 일본은 닌텐도와 세가, 그리고 소니의 가세로 20년 가까이 세계 비디오게임 시장을 독점했다.

70년대말 미국 전자오락기가 한국과 일본에 보급될 때 두 나라의 기술 수준은 비슷했다.

그러나 게임을 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은 천지 차이였다.

일본은 게임의 문화적, 산업적 가치를 인정하고 투자를 확대했던 반면 한국은 게임에 대한 규제만 일삼았다.

그 차이가 이제 세계 시장을 독점한 일본과 어떻게든 일본제품을 수입해 쓰려는 한국으로 바뀌었다.

인식의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8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일본 아케이드게임 「1943」을 보면 안다. 이 게임은 전투기가 함정을 폭파하면 다음 함정의 폭파로 단계가 뛰는 게임이다.

재미난 것은 미군 전투기이며 폭파 대상이 일본 함정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러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국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여론의 질타로 그 게임은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창의성의 한계를 두지 않았던 반면 한국은 상업성이 전무한 건전오락만을 요구했다.

그런데 90년대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한국이 게임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게임방, PC방이라는 문화 확산과 더불어 한국의 온라인 게임은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미국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세로 게임 왕국을 재건하려 한다.

일본 게임업체들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역사가 온라인시대로 접어드는 시점에 이른 것이고 이에 대비하지 못한 일본이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업체들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타리 쇼크가 그랬듯이 닌텐도 쇼크가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는가. 한국의 온라인 게임은 이미 미국의 그것을 제칠 단계에 들어섰다. 벌써 대만에서는 엔씨소프트를 비롯해 액토즈소프트, 제이씨엔터테인먼트 등 한국의 게임벤처업체들이 온라인게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중국과 홍콩 등 동남아와 미국, 유럽 등지로 확산될 것이다.

일본업체들은 PC게임방이라는 자생적인 인프라를 통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국의 온라인 게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한국업체와 제휴하려는 일본업체들도 나타나고 있다.

완전히 잠재웠다고 생각한 한국의 게임산업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는 창의성을 막는 교육과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남아 있다. 일본업체들도 이 점 때문에 한국의 게임산업을 대수롭지 않게 봤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게임산업에 대해 대대적으로 육성하려 하며 게임을 넘어 게임산업에 몰두하려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게임을 보는 인식이 확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20년의 격차를 단숨에 좁히기에는 일본업체의 아성은 너무 높다.

한국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의 꿈이 올해 어느 정도 가시화할는지 미지수이나 조짐은 좋다.

이제는 거대한 게임 왕국을 건설했으나 노쇠 기미를 보이는 일본과 아직은 애송이인 벤처들뿐이나 탄력을 받은 한국이 한판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 싸움은 단순히 시장 주도권 다툼을 넘어 문화의 대결이라는 차원에서 월드컵 축구보다도 더욱 관심거리로 떠오를 전망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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