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7년전인 94년 3월, 비디오게임기 산업계는 일본 마쓰시타전기산업이 내놓은 새로운 게임기 「리얼(Real)」의 출현에 주목했다. 이 게임기는 실제를 방불케 하는 고도의 표현력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입체영상 등 성능면에서 기존제품을 크게 앞질렀기 때문이다.
리얼의 등장으로 지난 83년 닌텐도의 8비트 게임기 「패미컴」 출시와 함께 각광을 받기 시작한 비디오게임기시장은 「슈퍼패미컴」 「제니시스」 등의 16비트를 거쳐 32비트게임기시대로 이행됐다. 지난 94년말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 세가의 「세가새턴」 등이 잇따라 출시되면서 32비트시대가 개화됐으며 주도권 경쟁도 본격화됐다.
당시 차세대 게임기인 32비트게임기시장 주도권 다툼에서는 각기 가전과 AV기기의 세계 최대업체로 게임기에 도전하는 마쓰시타와 소니가 어떻게 전문업체인 닌텐도 및 세가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시장진입에 성공할지가 관심거리였다. 결과적으로 마쓰시타보다는 뒤늦게 시작한 소니가 충실한 소프트웨어를 무기로 완승을 거뒀다.
한때 가장 우수한 게임기로 평가받던 리얼을 내세운 마쓰시타는 소프트웨어의 부실로 선공의 이점을 지키지 못한 채 결국 2년만에 시장에서 퇴출당해야 했다. 또 닌텐도는 지나치게 늦게 차세대기종을 투입해 소니를 중심으로 새로 짜여진 업계구도를 흔들지 못하고 2위로 물러앉았다. 차세대게임기시장을 둘러싼 1차전
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올해 비디오게임기시장에는 2차 차세대게임기 전쟁이 벌어진다. 경쟁양상은 7년전과 흡사하다. 이번에는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2(PS2)」로 기선을 제압하고 나선 반면, 닌텐도와 신규 참여업체 마이크로소프트(MS)가 각각 신형게임기 「게임큐브」와 「X박스」를 뒤늦게 출시해 정상도전에 나선다. 기종이 32비트에서 128비트로 진화되고 마쓰시타를 대신해 MS가 새 주자로 나선 것이 지난 90년대 중반의 상황과 다소 다르지만 나머지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경쟁구도도 90년대 당시와 같은 약체 세가와 대등한 소니·닌텐도·MS가 경합하는 「3강·1약」의 형세를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최대업체 소니는 지난해 3월 출시한 PS2가 전세계를 상대로 바람몰이에 성공, 128비트기 경쟁에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등 전세계로 시장을 넓히고 있는 PS2는 지난해말 현재 일본에서만 400만대 이상이 팔린 데이어 오는 3월말까지 전세계적으로 1100만대가 출시돼 대부분 판매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난 94년 등장한 PS의 누계 출하대수가 지난해 11월 중순 현재 1700만대인 점을 감안하면 PS2는 보급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이다.
닌텐도는 오는 7월 「게임큐브」를 내놓고 정상복귀를 노린다. 당초 지난해 연말 특수를 겨냥해 출시될 예정이었던 이 차세대 기종은 출시 시기가 반년이나 늦춰진 만큼 완성도가 매우 높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닌텐도측도 「게임기능에 역점을 둔 제품」이라며 게임전용기임을 강조하고 있다.
MS는 올 가을 디지털다기능디스크(DVD)·인터넷접속 기능은 물론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도 갖춰 PC와의 연계성을 높인 「X박스」를 내세우고 하드웨어시장 개척에 나선다. 이미 이 회사는 CPU·그래픽칩·메모리반도체·HDD 등 주요 핵심부품 공급업체를 모두 선정해 시장진출에 필요한 조건을 완비했다.
이들 3사 게임기는 제품 콘셉트(개념)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PS2와 X박스의 경우 DVD재생·인터넷접속 등 복합기능을 강조한 데 반해 게임큐브는 순수게임기를 표방하고 있다. 즉 다양성과 전문성의 차이인데, 사실 제품성능이 모두 일정수준에 올랐기 때문에 하드웨어만으로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는 게 시장분석가들의 시각이다. 따라서 90년대 중반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소프트웨어가 지원되느냐에 의해 업체 서열이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PS2의 경우 초반의 폭발적인 상승세는 지난해말 다소 꺾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기기의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사용자들을 몰입시킬 수 있는 대형 소프트웨어가 몇개 되지 않은 것이 주춤하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시장선점에 집착한 나머지 너무 서둘러 PS2를 출시, 소프트웨어 개발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휴대게임기를 1억대 이상이나 판매한 닌텐도는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풍부하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또 MS는 게임전문업체를 인수하거나 제휴를 추진하는 것으로 소프트웨어 확보체제를 마련해 놓고 있다.
현재 매각·사업중단 등의 추측설로 곤욕을 치루고 있는 세가의 향후 움직임은 주도권 향배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가가 MS나 닌텐도와 협력할 경우 소프트웨어·하드웨어 기술은 물론 판매 등에서 강력한 시너지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128비트기종 차세대게임기의 주도권 다툼은 이미 시작됐다. PS2로 선점에 나선 소니에 맞서 닌텐도와 MS는 이미 앞으로 나올 제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대기수요를 유발시키고 있다.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들 4사의 전쟁에서 이들이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 또 우열이 가려질 연말에 누가 웃게 될지는 벌써부터 업계의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신기성기자 k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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