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 못 되고 있어.』
가네코 히사시 NEC 사장은 책상위에 놓인 98년 결산보고서를 검토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며 혼자 말을 내뱉었다.
99년 벽두부터 가네코 사장은 최악의 새해를 맞았다. 지난해 적자를 예상하기는 했으나 생각보다 심각했다. 적자 폭이 무려 1500억엔을 넘어 선 것.
더욱이 지난해 NEC의 일부 핵심 간부들이 방산 비리로 대거 체포됐다. 회사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히사시 사장은 재계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외부에서 열린 신년행사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장만 쌓였다.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듯이 가네코 사장은 현대전자와의 특허 소송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다. 『여기에서 이기면 자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은 곧 수그러들 것이다.』
1월 중순 들어서자, 현대전자와의 소송건도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오히려 불리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허담당 임원은 현대전자가 특허 침해를 이유로 제소한 7건 가운데 1건에 대한 첫 승소판결이 이뤄졌다는 불리한 보고를 올린 것.
이 임원은 『현실적으로 소송을 지속시키는 게 이로울 게 없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죄송합니다만 타협이 최선입니다』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가네코 사장의 기대는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그는 현대전자와 합의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우리가 진 것처럼 비쳐서는 안돼』라고 말했다. 마음 한구석은 어두웠다. 그는 『내 시절도 이젠 끝났군』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99년 1월 25일 NEC와 현대전자는 특허 공유를 전격 발표했다. 반도체 특허 법정의 상징이다시피한 미국 버지니아 동부지법에서 1년 이상 진행된 소송을 타결한 것이다.
외견상 두 회사는 원만히 타협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위안하는 것은 NEC 사람들뿐 이었다. 지금까지 일본 D램 업체가 한국 업체와 모든 특허를 공유키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NEC가 애송이에 무릎을 꿇었다.」 D램 업계는 이번 NEC-현대전자 특허 협상 결과를 이렇게 풀이했다.
당시 NEC는 인텔에 이어 세계 반도체업계 2위를 지켜왔다. 삼성전자는 6위였으며 현대전자는 저만치 멀리 있었다.
NEC가 현대전자와 그것도 특허 소송에서 패한 것이다. 한달뒤 NEC는 경영자를 교체해야 했다. 가네코 사장이 물러나고 니시가키 고지 전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지휘봉을 잡은 니시가키 신임 사장은 현대전자로부터 수억달러를 받지 못하게 된 것보다도 NEC에 대한 업계의 조롱에 분통이 터졌다. 한 때 일본 D램 왕국을 건설했던 NEC에 몸담아 오면서 이번처럼 화가 난 적은 없었다.
실리주의자인 니시가키 사장은 그러나 곧 마음을 다시 잡았다. 3월 공식 취임하자마자 그는 스탭들에게 반도체 사업에 대한 새로운 전략 수립을 지시했다. 스탭들이 내린 결론은 세가지였다.
첫째 사업구조상 D램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 둘째 앞으로 차세대 D램을 잡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솔로체제로는 개발, 양산 경쟁에서 한국업체를 이길 수 없다.
그러면 누구와 손잡을 것인가. 스탭들은 히타치를 추천했다. D램 시장 9위이나 기술력이 뛰어나고 다른 회사보다도 협력 파트너로 제격이라는 판단이었다.
두 회사가 힘을 합치면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이 17.2%로 뛴다. 삼성전자와 현대·LG 통합사의 점유율에 버금가며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를 앞질러 해볼 만하다는 게 NEC의 분석이었다.
니시가키 사장은 쇼야마 레츠히코(庄山悅彦) 히타치 사장과 도쿄의 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쇼야마 사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니시가키 사장의 제의에 맞장구를 쳤다.
6월 23일 NEC와 히타치는 D램 사업 연내 합작사 설립을 전격 발표했다. 삼성전자, 현대전자, 마이크론과 함께 세계 D램 시장을 「빅4 체제」로 이끌어가겠다는 선언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규모확대를 통한 코스트 경쟁력의 강화가 불가가결하다.』 발표 석상에서 니시가키 사장의 목소리는 전례없이 비장했다.
두 회사의 발표는 현해탄을 건너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이윤우 사장에게 직접 보고됐다. 이윤우 사장은 NEC-히타치의 합작 발표에 대한 보고를 아무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는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나 이렇게 빨리 전개될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이 사장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멀찌감치 떨어뜨려놓은 후발 업체들이 마치 로봇 조립하듯 합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현대와 LG의 통합이 그랬고 이번 NEC와 히타치의 합작도 그랬다. 이들보다 강력하지는 않으나 도시바와 후지쯔도 98년말 1기가 D램 개발에 제휴했다. 삼성주변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았다.
『이러다가 1위를 지키지 못하는 게 아닌가.』
사실 반도체업계에서 1위를 지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특히 D램 시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끊임없이 신기술을 먼저 개발하고 양산해야만 한다. 그래서 선두업체는 늘 부담스럽다.
이 사장의 표정은 곧 밝아졌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D램 업계의 재편은 삼성전자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는 불필요한 경쟁자들이 사라지면 상위 업체의 시장 장악력은 높아진다. 상대적으로 반도체 가격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신경쓸 일도 그만큼 줄어들게 됐다. 이제는 2∼4위 업체만 신경쓰면 된다.
『일본업체들의 합종연횡은 곧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도저히 좁힐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현 아닌가.』 이 사장은 지난 10여년을 떠올렸다. 불황기에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로 승승장구했던 순간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사실 삼성전자가 D램 1위에 오른 것도 불황기였던 87년 3라인 투자를 단행해 이듬해 1MD램의 선두업체로 오른 게 결정적이었다. 또 업계 첫 8인치 투자로 4MD램 시장을 석권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경쟁사들이 체제를 정비할 때 먼저 치고 나가자.』 이 사장은 NEC-히타치의 합작에 대해 걱정하는 임원들을 되레 안심시키며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대대적인 설비 투자 계획을 마련하라.』
99년 10월 중순, 삼성전자는 기흥공장 인근의 화성에 대규모 D램 신규라인을 건설하는 2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한다. 아직 D램 시장이 호황에 접어들지 않은 점을 고려해 삼성전자는 먼저 고성능 대용량 D램 전용 공장인 10라인 건설만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10라인 다음으로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줄줄이 잡아놓았다. 모든 계획은 이미 그해 여름에 나왔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현대전자도 NEC-히타치의 만만치 않은 공세에 자못 긴장했다. 그렇지만 현대전자도 LG반도체의 통합으로 역량이 커졌다.
현대전자는 이미 특허 소송에서 NEC를 굴복시키면서 D램 시장에서 파워를 과시했다.
이제는 넘쳐나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해 1위인 삼성전자와 세계 D램 시장을 나눠갖는 일만 남았다.
박종섭 사장은 그동안 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번진 불길을 끄는 소방수 역할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불길을 껐다. 『올 연말까지만 참자.』 박종섭 사장은 통합에 따른 체제 정비를 마무리하는 대로 공격적인 투자를 재개할 생각이다.
NEC-히타치, 도시바-후지쯔 등 일본 D램 업계 경영자들은 이러한 한국업체들의 움직임이 꽤나 불편하다. 괜한 벌집을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앞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한일간에는 포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시작한 싸움을 중도에서 끝낼 수는 없지 않는가.
한국과 일본의 D램 열차가 각각 마주 보고 질주하고 있다.
80년대까지는 일본이, 90년대에는 한국이 각각 세계 D램 시장을 주도해왔으나 이번과 같은 전면전은 없었다. 앞으로도 전면전은 없을 것이다. 패자에게는 자리조차 내주지 않는 게 「D램 강호」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D램 전쟁에는 미국 마이크론과 독일의 인피니온도 있으나 이들에는 지원군이 없다. 결국 D램 시장 패권을 놓고 한국과 일본 업체가 겨루게 돼 있다.
『무슨 소리냐, 한국 업체들이 1, 2위를 차지해 싸움은 이미 끝난 게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잘 모르는 소리다.
이제 D램 전쟁은 킬로 D램, 메가 D램에 이어 기가 D램이라는 3차전을 앞두고 있다. 1차전은 일본이, 2차전은 한국이 승리했으나 3차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단은 한국 업체들은 소자 기술에서 앞서나 일본은 장비기술에서 우세하다. 3차전은 바로 장비 싸움에서 결판날 가능성이 높다.
잃어버린 D램 왕국을 되찾기 위해 일본은 정부까지 나섰다. 일본 통산성은 지난해 10월 NEC, 히타치, 도시바, 소니 등 10개 반도체사를 끌어들여 20년 만에 민관합동기술개발체제를 부활했다.
여기에는 0.1미크론 이하 초미세 회로설계기술도 포함돼 있다. 내년부터 본격 실행에 들어간다.
일본은 미국과의 경쟁을 겨냥하고 있으나 1차적으로 한국 D램 업체들과 경쟁해 D램 왕국의 재건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의 대응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업체들만이 맨몸으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도구의 역사로 보면 인류는 석기→청동기→철기를 거쳐 다시 석기로 되돌아왔다. 바로 반도체의 원료인 규석(硅石)이다.
규석기(硅石器)시대의 최강자는 미국이다.
한국은 메모리 제품을 바탕으로 미국과 규석기시대를 양분하려 하며 일본은 이러한 한국을 강력히 저지하려 한다. 지난 20년 동안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규석기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많이 본 뉴스
-
1
스타링크 이어 원웹, 韓 온다…위성통신 시대 눈앞
-
2
단독CS, 서울지점 결국 '해산'...한국서 발 뺀다
-
3
美 마이크론 HBM3E 16단 양산 준비…차세대 HBM '韓 위협'
-
4
LG 임직원만 쓰는 '챗엑사원' 써보니…결과 보여준 배경·이유까지 '술술'
-
5
[전문]尹, 대국민 담화..“유혈 사태 막기 위해 응한다”
-
6
초경량 카나나 나노, 중형급 뺨치는 성능
-
7
NHN클라우드, 클라우드 자격증 내놨다···시장 주도권 경쟁 가열
-
8
'파산' 노스볼트,배터리 재활용 합작사 지분 전량 매각
-
9
BYD, 전기차 4종 판매 확정…아토3 3190만원·씰 4290만원·돌핀 2600만원·시라이언7 4490만원
-
10
DS단석, 'HVO PTU 생산' SAF 원료 美 수출 임박…유럽 진출 호재 기대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