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품.소재산업 르네상스를 위하여>12회-세트·부품업체간 협력

「악어와 악어새」. 국내 전자메이커들과 부품업체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적합한 말이 없다. 기술 하나로 무장한 중소 부품업체들은 전자메이커들에 자금·기술을 지원받고 납품함으로써 성장하고, 대형 전자메이커들은 부품업체에서 값싼 부품을 공급받아 제품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관계는 80년대 이후 조립 대기업을 중심으로 도급거래의 비중이 증대되면서 양적으로 확대돼 왔으나 아직 대등한 위치에서의 동반자적 협력관계는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IFM를 거치면서 이같은 공생관계에 틈이 벌어지고 있다. 자금과 판로·기술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부품업체들을 전자메이커들이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자메이커들이 일방적으로 납품단가를 결정하거나 변경해 수탁 부품업체들은 경영상 애로를 겪고 있다.

휴대폰에 내장되는 마이크로스피커와 마이크, 키패드를 만드는 일부 업체들은 요

즘 죽을 맛이다. 국내 전자메이커들만 바라보고 제품을 생산해온 업체들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마이크로스피커를 만드는 Y사의 관계자는 『휴대폰을 생산하는 대기업 및 중견기업들이 서로 가격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휴대폰용 부품업체들을 가장 만만하게 보고 얼마 되지도 않는 부품가격을 깎고 있어서 인건비 건지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이들 휴대폰용 부품업체는 올해 휴대폰 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고 지난해 생산설비를 확충했으나, 최근 휴대폰 시장이 다소 위축되고 부품도 제가격을 받지 못하면서 경영난에 처해 있다. 이러다보니 기술 개발이나 새로운 시스템 도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LCD관련 부품·재료를 공급하는 A사의 한 임원도 『소자업체들이 IMF 당시 제품가격 인하를 요구해 들어줬는데, 올들어 소자업체들이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리면서 사정이 좋아졌는데도 정작 제품가격은 올려주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이에 따라 일부 부품업체에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다. 자금과 기술,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 기업들의 경우 도산할 처지에 놓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용 부품을 만드는 C사의 사장은 『주위의 일부 영세 부품업체들은 그동안 의욕적으로 갖춰 놓은 각종 생산장비들을 헐값에 팔아서라도 회사 운영자금을 확보해야 할 처지를 맞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부품업체들은 『대형 전자메이커들이 부품제조업체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언제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도로만 보고 있다』며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형 전자메이커들은 『수탁 부품업체들의 애로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우리도 매출이 줄고 현금 사정이 어려운데 마냥 부품업체들을 도와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통신기기용 부품업체의 K사장은 『이처럼 일부에서 부품업체와 전자메이커들이 등을 돌릴 경우 이제 불이 붙기 시작한 부품 국산화 열풍이 식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최근 대형 전자메이커와 부품·소재기업 사이의 협력 사례도 점차 늘고 있다.

대형 전자메이커들은 이른바 수탁기업체협의회와 같은 협력사 협의체를 만들어 협의회에 속해 있는 협력기업들에 대해서는 자금지원, 기술 지도·이전, 부품 공동개발, 신용보증지원, 경영지도, 해외동반진출, 수출대행 및 알선, 사업이양 등 각종 지원을 꾸준히 늘리고 하다.

레이저앤피직스의 한기관 사장은 지난해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반도체용 핵심 모듈의 국산화에 뛰어들었다. 한 사장은 제품의 완성도와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기술지원과 평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대기업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회사는 다행스럽게 현대전자가 수개월동안 엔지니어들을 배치해 공정기술을 지원해줌으로써 모듈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현재 양산을 준비중이다.

수원에 있는 셀라이트의 홍성균 사장도 최근 부품·장비의 공급이 본격화되면서 생산설비를 구축하기 위해 수십억원의 자금이 필요해 고민하던 중 삼성벤처에서 기술력을 인정해 15억원을 단번에 투자함으로써 설비확충과 기술개발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산업 전반에 걸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라 어떻게 납품업체를 재편할 것인가와 어떠한 형태로 협력관계를 유지해갈 것인가가 주요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경제연구원이 얼마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실태 파악 및 개선방안 모색을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탁기업체협의회의 확대를 통해 동반자적 협력체제를 구축해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도급조직을 개방적 네트워크 체제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조사

됐다.

그러나 동반자적 협력관계의 질적인 심화를 위해서는 납품단가의 적정화 및 중소

기업의 기술력 향상과 납기준수 문제 등이 해결돼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정부정책과 관련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협력관계가 직접적인 규제에 의해 구축되도록 유도하기보다는 양자간의 필요와 상황인식에 따라 자율적으로 심화될 수 있도록 간접적인 방식을 지향할 것으로 요구됐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앞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관계는 수직적 계열화를 통한 도급 거래의 양적 확대가 중심이 된 협력관계에서 자율적 협력기반의 구축을 통한 질적 협력관계를 확대·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악어가 악어새를 고의든 아니면 실수로 잡아먹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전자메이커와 부품업체들이 서로 머리를 맛대고 새로운 협력관계의 틀을 짜야 할 시점이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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