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반도체 업체>공룡들 각축...한반도는 주라기시대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삼성전자 전력용 반도체 사업부문 인수」 「인텔의 인터넷데이터센터(IDC) 국내 구축」 「대만 ASE의 모토로라반도체 파주 공장 인수」 「앰코테크놀로지의 아남반도체 패키징 및 테스트 부문 인수 및 3년간 10억달러 투자 결정」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용 칩 전문업체인 영국 비라타의 국내지사 설립」 「퀄컴의 반도체 영업부문 분리 결정」.

지난해 중반부터 국내에서 다국적 반도체 기업들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국내 경제의 회복과 인터넷·통신 시장의 폭발적인 확대에 따라 기존 국내 진출 반도체 다국적 기업들은 너나없이 사업을 확장했고 신규업체들은 한국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마디로 「신 코리안 드림」을 좇은 반도체 기업들의 대대적인 공습이다.

다국적 반도체 기업의 대표주자인 인텔은 전통적 주력제품인 CPU 및 플래시메모리로 올상반기 성장률 100%라는 기록적인 매출을 달성하고 인터넷·통신·무선컴퓨팅 관련 사업에도 박차를 가해 아시아에서는 세번째로 국내에 IDC를 설립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는 전통적 강세인 아날로그 IC 이외에 디지털신호처리기(DSP)에 주력, DSP 시장의 기린아로 떠오르면서 지사 매출이 30%나 증가했다.

삼성전자 파워디바이스 부문을 인수한 페어차일드는 전력용 반도체 전문기업으로 변신에 성공, 운영 1년만에 국내법인 매출 5억3000만달러를 달성하고 올해 상반기 전체 순익이 1억달러를 초과하면서 흑자구조로 전환했다.

커넥선트시스템스는 99년 록웰에서 공식 분리, 전환하면서 올해 국내시장 매출 2억5000만달러를 기대하고 있다.

퀄컴은 국내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시장발전에 힘입어 지난해 지사매출이 이미 10억달러를 이미 돌파했다.

이밖에 영국 비라타(Virata)가 국내 ADSL 시장을 목표로 의욕적으로 진출, 분기별로 2배 이상의 매출성장을 기록했으며 샌디스크·몬트레이·글로브스팬·발렉스 등이 국내시장의 중요성을 인식, 마케팅을 강화하거나 생산설비를 신설중이다.

결국 인텔·AMD·TI·페어차일드·퀄컴 등 주요 반도체 다국적 기업의 국내 개별매출이 중견그룹 수준인 1조원에 이른다. 이들 업체의 매출총액은 어림잡아 50억달러를 넘으며 장비·소재·부품업체들의 매출을 포함하면 80억달러에 육박할 전망이다.

단적으로 비교해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올 매출예상인 130억달러의 절반을 웃돌며 국내 최대 부품회사로 올해 매출목표가 4조5000억원(4.5억 달러)인 삼성전기의 20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몇몇 업체를 제외하고는 국내 제조기반 없이 순수 기술지원과 마케팅만으로 먹고 사는 다국적 반도체 기업의 특성을 감안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수치다. 표참조(주요 반도체 다국적 기업 국내지사 매출, 본사 추정)

국내 다국적 기업들은 명실상부하게 거대한 세력군을 형성한 셈이다.

반도체 다국적 기업의 국내시장 확대 및 신규진출이 늘어난 것은 국내시장이 성숙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우선 PC는 물론 인터넷·통신 시장의 호황으로 이에 따른 반도체·디스플레이 수요가 급증했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현재 국내 인터넷 이용자수가 1603만명이고 통계청이 비교·분석한 「통계로 본 세계속의 한국」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인구 100명당 이동전화 가입자수는 50으로 세계 6위다.

지난해 개인 컴퓨터 보유대수도 5.1명당 1대꼴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ADSL·케이블TV·종합디지털통신망(ISDN) 등 인터넷을 통한 초고속 통신망 설비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서비스에 들어간 ADSL의 경우,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의 총 가입자수가 100만명에 달하며 연말까지 300만∼350만명을 기록할 전망이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자들이 몰려드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두번째로 한국은 일본을 제외한 기타 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숙련된 기술인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는 점이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는 기술인력 양성의 축인 동시에 다국적 기업 공통의 최대 고객이다.

제조기반을 보유한 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ASE코리아·발렉스코리아 등의 경우에는 기술인력이 풍부해 고임금에도 불구, 생산비용을 낮출 수 있는 국내시장에 주목했다.

시장의 성숙과 더불어 이들 반도체 다국적 기업들을 다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긍정적 시각보다는 부정적 견해가 많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상반기 수출총액 828억달러 중 반도체가 119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14%를 달성한 효자종목이지만 다국적 기업을 통한 반도체 수입규모도 95억달러에 달했다.

국수적인 사람들은 다국적 반도체업체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마치 「국부 유출의 역적」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에는 국회 재정경제위 모 의원에 의해 97년부터 99년 상반기까지 국내에서 영업중인 다국적 기업들이 5900억원의 세금을 탈루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국내에 진출한 반도체 다국적 기업이 가장 우려하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은 국내 매출액 공개에 유독 민감하다. 마케팅과 영업 루트도 극비사항이다.

자신을 백안시하는 국민정서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다국적 기업들에 비밀이 많은 것은 거래업체의 요청이나 회사의 보안수칙에 따른 것이 일반적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다국적 기업들은 국내 기업에 비해 주가나 세금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편이어서 정보공개를 꺼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다국적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도 많다. 국내 기술력의 향상, 글로벌 기업문화의 전수, 경쟁유발 등이다.

이들 다국적 기업의 제품이 국내에 공급되면서 비공식적으로나마 기술이전의 기회가 발생하고 그들의 경쟁적인 사(社)문화가 국내로도 자연 유입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IBM이 한 때 한국의 수출 50대 기업으로 선정된 적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은 500여개.

이중 반도체 관련 다국적 기업은 10%를 상회한다.

89년 친목단체로 출발, 99년 4월 공식 결성된 다국적기업최고경영자협회(KCMC)가 110개 회원사를 중심으로 정기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여기에 속한 반도체 분야 회원사는 7∼8개다.

한 때 전세계 식민지를 보유했던 영국도 스코틀랜드 투자개발청을 중심으로 지적재산(IP)을 거래하는 거래소인 「VCX」에 외국기업을 유치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외국업체가 국내에서 번 돈도 우리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비밀스런 다국적 기업의 경영행태에 대해서도 국내 주식시장 등에의 상장을 유도해 자연스럽게 공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반도체산업에서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다국적 반도체업체들에 새로운 역할론이 새삼 제기되고 있다.

<김인구기자 clark@etnews.co.kr>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