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1회-동북아에 부는 바람

◆19세기에는 유럽, 20세기에는 미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했다. 그러면 21세기에는 누가 주인공이 될 것인가.

미래학자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아시아를 꼽는다. 인간의 지식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서 인적 자원이 풍부한 아시아가 급부상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아시아 중에서도 태평양을 끼고 있는 동북아시아를 1순위에 올려놓고 있다.

한국·일본·중국(대만 포함) 등 동북아 3국은 전략 요충지라는 이점에다 정부와 민간의 일치단결로 경제패권을 키워가면서 내심 세계 맹주자리의 등극을 노리고 있다.

물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은 21세기에도 여전할 것이다. 그렇지만 후반부에는 경제력을 키워가는 동북아 3국이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망 때문인지 동북아 3국 사이에 알게 모르게 경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21세기 경제의 핵인 IT산업에서 이들 국가간 선점경쟁은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3국은 견제하면서도 세계 패권을 미국으로부터 이전받기 위해 서로 긴밀히 협조해야 하는 관계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북아 3국은 서로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삼국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세 나라가 어떻게 3국시대를 맞이하고 있는지 또 경쟁과 협력이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 미리 살펴본다.◆

7월 23일 일본 오키나와현 나고시의 8개국(G8)정상회담장. 공동선언문 발표장으로 향한 모리 요시로 총리의 발걸음이 가볍다.

그의 얼굴은 공들여온 첫 작품을 드디어 온 천하에 공개한다는 기대에 가득찼다.

작품은 「정보기술(IT) 오키나와 헌장」. IT에 대한 글로벌한 협력을 촉구하는 이 헌장은 G8회담에서 처음 의제로 설정돼 채택됐다.

다른 정상들은 그저 선언뿐인 이 헌장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모리 총리는 달랐다. 이것 밖에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일본은 IT강국이며 자신은 IT시대를 이끄는 정치지도자」. 그는 자국민은 물론 지구촌 관객들에게 보여줄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순간 만큼은 자신을 향해 줄기차게 제기되는 자질시비를 잊을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 들인 비용은 무려 800억엔. 지난해 쾰른 정상회담에 비해 100배 이상 많은 규모다. 「실속없는 호화잔치」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또 모리 총리는 취임 이후 잇단 실언으로 국내외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신의 나라」 「교육칙어」 「한반도의 두 민족」 등의 발언은 가깝고도 먼나라인 한국과 중국의 신경을 자극했다.

오죽했으면 일본의 외교관들이 『일본의 대 동북아 관계의 가장 큰 변수는 총리의 입』이라고 말했을까.

일본 정부가 이번 회담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 것은 바닥까지 떨어진 총리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그의 국제무대 데뷔를 성공적으로 꾸미기 위해서다.

IT산업의 종주국인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IT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모리 총리가 이상하기만 했다. 『IT와 집적회로(IC)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 맞어?』

클린턴은 그러나 모리 총리가 회담 며칠 전에 컴퓨터 특강을 받은 것을 알지 못했다. 특강은 NTT 보도과장을 지낸 세코 히로시게 의원의 아이디어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지 개선과 IT강국 과시에 단지 800억엔만 쓴 게 아니다. 일본 정부는 개도국 등의 정보격차 해소를 위해 5년 동안 150억달러를 내놓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모리 총리는 다른 국가의 동참이 없어 못내 아쉬웠지만 게의치 않았다. 어쨌든 세계 IT산업에 일본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었으며 덤으로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도 심게 됐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다른 7개국 정상과 e메일을 주고 받는 모습을 지구촌 관객들에게 보여줘야지.」 모리 총리는 100㎏이 넘는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소년 같은 상상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다음날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은 파룬궁(法輪功)을 분쇄하고 인터넷 논단을 폐쇄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이번 지시는 며칠전 인터넷에 나온 한 공개서한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의 눈엣가시인 파룬궁 최고지도부는 『1년전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지령을 내린 것은 부적절한 조치며 22일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항위시위를 갖겠다』라고 선언했다. 파룬궁 지지자들은 실제로 시위를 벌였다.

집단행동. 그것도 「아킬레스건」으로 여기는 천안문사태가 일어난 곳에서의 시위에 중국 정부는 파룬궁의 공개서한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장 주석의 지시에 따라 중국정부는 인민일보가 운영중인 창궈룬탄(强國論壇)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인터넷 논단을 폐쇄했다.

한달 뒤인 8월 21일 장 주석은 베이징에서 열린 한 행사의 연단에 섰다. 제16차 세계컴퓨터회의 개막식이다.

『최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인터넷이 세계 경제성장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세계인 정보교환의 견인차인 것은 사실이나 과학적이고 건전하지 못하고 심지어 쓰레기 같은 정보들이 마구 넘치고 있다』면서 그는 인터넷 검열에 대한 국제협약을 제안했다.

그의 발언은 한달전 인터넷논단 폐쇄를 지시할 때와 비슷한 논조다. 다만 해석은 한달전과 달라졌다.

그가 인터넷의 장점을 열거한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장 주석은 전기공학과 출신이며 한때 중국 전자산업정책을 총괄하는 전자산업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그가 정보기술의 핵으로 떠오른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서는 경제강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실제로 중관춘(中關村)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인터넷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인구가 올들어 1600만명을 넘을 정도며 상반기 인터넷 및 정보통신 관련산업의 수출액이 13억달러를 넘었다.

장 주석의 이날 발언은 인터넷 산업자체를 육성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인터넷의 부정적인 측면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인터넷은 체제도전세력에게 쓸모있는 도구다. 파룬궁이 아니더라도 중국 인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관리들의 부패상을 잇따라 폭로해 중국 정부를 긴장케 했다.

더욱이 장 주석은 20년간의 심복인 자팅안(賈廷安) 주석 판공실 주임 거대 부패사건에 연루돼 속이 편치 않은 상태다.

『장 주석은 경제적으로 인터넷 산업을 적극 육성하겠으나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공세는 용납하지 않을 것』.

장 주석은 자신의 생각을 「부처님 손바닥 보기」처럼 분석하는 외국 언론들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장 주석이 인터넷 검열에 대한 국제협약을 촉구한 날,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쉐라톤호텔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ICEC 2000」이라는 행사다. 나흘 동안 열린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EC)학술대회다.

김 대통령은 세계적인 EC전문가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e코리아의 비전」이라는 연설을 했다.

「지식정보화의 축인 EC산업을 적극 육성해 한국을 세계속의 EC강국으로 만들겠다.」 그의 연설내용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김 대통령은 나아가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전자상거래 선진국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EC와 관련한 제반문제에 대해 세계 어느 나라, 어떤 국제기구와도 긴밀히 협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일주일전 김 대통령은 8·15 경축사를 통해 우리의 소명으로 통일과 함께 정보통신산업 육성을 꼽기도 했다.

김 대통령의 이같은 의지는 오는 10월 ASEM전자상거래 회의에서 또한번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식정보화를 소리높여 외쳐왔다. 국무 회의에서도 제일 먼저 노트북을 펼쳐 놓는다.

그의 지식강국에 대한 의지가 워낙 높아서인지 정부내에서도 「지식」은 단골 단어였다. 한 다국적 소프트웨어 업체는 정부 입찰 프로젝트의 제안서에 「정보」라는 말만 썼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이를 모두 「지식」으로 바꿔놓는 해프닝도 있었다.

어쨌든 김 대통령은 「통일의 물꼬를 튼 대통령」과 아울러 「지식정보화에 앞선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그는 『동북아 3국 지도자 가운데 IT에 대한 식견에서 자신만큼 뛰어난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며 흡족해한다.

동북아지역이 온통 디지털 혁명에 휩싸였다. 한국·일본·중국·대만 할 것 없이 디지털시대를 여는 IT의 도입 열기가 뜨겁다.

디지털 바람은 기업은 물론 금융가로까지 번졌다. 최근 다소 주춤하기는 했으나 각국의 주식시장은 인터넷과 디지털 열풍에 힘입어 호황을 누렸다.

아시아에 퍼졌던 환율위기가 언제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한국은 아예 그 바람을 타고 「IMF체제」라는 최악의 경제상황에서 거의 탈출했다.

디지털 바람은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에까지 불어 저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이미지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각국의 정부정책 역시 디지털 시대에서 어떻게 강국이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저마다 디지털 산업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세계에서 이 지역만큼 디지털 열풍이 거센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디지털 산업의 뿌리는 전자산업인데 동북아 국가 모두 전자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국가경제의 사활이 디지털 산업에 달려 있다시피한 상황에 이르면서 관련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최근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미국에 내준 것을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 때문이라고 봤다. 그렇지만 그렇게 보는 분석가는 이제 없다.

이미 세계 경제의 핵심축인 IT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미국으로부터 빼앗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세계 경제권력을 되찾으려면 하루빨리 IT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이러한 일본의 절박감 때문에 모리 총리는 「벼락치기 컴퓨터 공부」까지 해야 했다.

한국은 부존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성장한 전자산업을 더욱 육성하는 것만이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반도체·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휴대폰 등의 수출호조로 외환위기를 극복하자 더욱 각인됐다.

더욱이 중국 등의 후발주자가 맹렬히 ●아오고 있어 이들과의 격차를 넓힐 수 있는 한 단계도약이 시급한 상태다. 정보기술은 이를 가능케 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중국과 대만은 세계 경제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려면 적어도 한국의 전자산업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중국은 홍콩을 되찾으면서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여기에 비록 적대관계기는 하지만 대만까지 끌어들여 대중화 경제대국을 건설하면 한국은 물론 일본과 미국의 경제패권까지 넘볼 수 있다.

세계 전자제품 생산에서 동북아 지역의 비중은 30%를 넘는다. 일단 이 지역에서 일등하면 세계 전자산업의 패권장악은 「따놓은 당상」이다.

이 때문에 전자산업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세 나라(한국·일본·중화권)의 경쟁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또 어차피 세계 전자산업의 중심지역인 마당에 서로 공조하려는 움직임도 동시에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여는 2000년, 갈등과 협력이 교차하는 새로운 전자 삼국시대가 열렸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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