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金容琥, 부경대 교수)
<필자약력>
1955년 대구생, 서울대 학사 및 석사(언론정보학), 미국 위스콘신대 박사(방송전공), 방송위원회 책임연구원, 동국대 교수, 부경대 교수(현)/공영방송발전위원회 간사, 선진방송정책연구위원회 기획위원, 방송평가특별위원회 간사/방송평가제, 프로그램등급제, TV폭력과 V칩 관련연구논문이 다수 있으며, 저서로는 <계량정보학>(공저), <방송시청자의 이해>(역서)가 있음.
지난 연말 가까스로 통합방송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국회와 정부가 구성시한 막바지까지 방송위원 선정에 시간을 다 보내 새로 구성된 방송위원회보다는 한시적으로 권한이 부여된 문화부가 시행령 제정을 떠맡는 것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방송위원회 구성시한 전에 방송위원들을 선정하여 방송위원회가 시행령 제정을 주도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그러나, 지난일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세상일이 다 그렇다고 접어두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정작 방송위원회의 문제는 다른 데 있으므로 이를 논의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방송정책권을 두고 방송위원회와 정부가 마찰음을 낸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1980년 서슬이 시퍼런 신군부는 언론통폐합을 단행하고 언론기본법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방송위원회를 도입하였다.
언기법은 방송위원회를 방송최고의결기구로 규정하였으나, 군부의 눈치보기에 바쁜 방송위원회는 도입 두 해만에 사실상 방송심의위원회로 전락하였다. 언기법이 폐지되던 1987년에 제정된 방송법은 다시 방송위원회에 방송편성과 방송운용의 기본정책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90년대초의 서울방송 도입을 앞두고 방송위원회의 방송운용정책은 무력하기만 했다. 당시 정부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논리는 이랬다. 방송법상의 방송편성기본정책과 방송운용기본정책은 형식논리상 방송기본정책의 하위개념이고, 방송기본정책은 정부소관사항이라는 것이었다.
실제적으로는 방송제도연구위원회를 만들어 방송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론을 만들었고, 조자룡 헌칼로 방송위원회를 와해시켰다. 1990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개정방송법을 통하여 사실상의 방송정책권은 정부로 환원되었다.
형식논리의 허점은 편성이나 운용이라는 법률용어를 사용하는 정부예산업무와 대비하면 분명해진다. 실제로 예산정책에서 예산편성정책과 예산운용정책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는가.
방송편성정책과 방송운용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예산편성정책은 개별 정부부처의 예산세부항목설정이나 미세한 계수조정이 아니라 정부예산편성이라는 거시적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방송편성정책은 개별 방송사의 프로그램배열이 아니라 방송채널의 할당과 방송역무구분을 의미한다. 같은 논리로 방송운용정책은 개별 방송사의 운용정책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한 국가의 방송운용정책을 의미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새 방송법은 십 수년 전에 제정된 구 방송법보다 후퇴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구 방송법은 선언적 권한을 부여했을 뿐 실행규정이 없어 방송위원회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새 방송법은 방송기본계획까지를 포함하는 일체의 방송정책권과 인허가행정권을 방송위원회에 부여하고, 방송위원회에 그 시행령의 제안권을 부여하였으므로, 말장난으로 세월 보내는 것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과 시청자들은 방송위기를 말한다. 공영방송은 재정위기론을 내세우면서 공영편성을 사실상 포기하고, 민영방송은 시청률경쟁에 정신이 없고, 지상파방송의 기득권에 밀려 광고시장에서 소외된 케이블방송은 홈쇼핑으로 날밤을 새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부는 중간광고를 허용해야 방송문화가 산다며 불난 데 기름을 붓고, 갓 태어난 방송위원회는 시행령도, 위원회규칙도 없고, 사무처도 구성되지 않아 연장 탓하는 목수가 되고 있다.
방송개혁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는 분위기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방송위기는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방송계 전체의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위기이며, 개별 방송사업자의 위기가 아니라 방송전체의 총체적 위기이다.
공보처를 폐지하고, 새 방송법을 만든 지금, 방송개혁의 과제는 새 방송위원회에 맡겨졌다. 그러나, 정작 방송개혁을 주도해야 할 방송위원회는 아직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방송개혁의 성공여부는 이제 방송위원회의 방송평가제에 달려 있다.
어쨌든 일을 눈앞에 둔 목수가 연장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새 연장을 쥐고서 옛 가락에 맞지 않다고 푸념할 수도 없다. 낡은 연장을 버리고, 새 연장 사용법을 익혀서 헌집 허물고 새집 짓기에 나서야 한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아마 목수없이 집짓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것이 뻔하지 않는가.
사실 방송사업자의 허가와 재허가 실질심사가 법조문이 없어서 안된 것은 아니다. 역대 방송법상에는 항상 담겨져 있었다. 유명무실했던 것이 문제였다. 이전의 정부들은 국민의 재산인 전파자원을 방송사업자에게 무료로 할당하여 왔지만, 허가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까지 단 한 건의 재허가신청도 거부된 적이 없었다. 사실은 정부가 거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혜허가라는 오해까지 받아가면서 방송사를 허가한 역대정부가 재허가거부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조차 불가능했다. 우리보다 발전된 다른 나라에서 잘 나가던 방송사의 허가가 취소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득히 먼 나라의 전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 나라가 갑자기 방송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국으로 변한 모양이라고 접어두었다.
국내에서는 그 기간동안 시청료납부거부와 TV끄기라는 시민운동이 있었다. 국민의 권리와 재산을 수탁한 국가기관이 침묵하면 시민불복종이 시작되는 게 역사의 법칙이다.
새 방송법은 허가와 재허가의 실질심사가 가능하도록 종합적인 방송평가업무를 방송위원회의 직무에 포함하였다. 새 방송법의 31조는 『방송위원회는 방송사업자의 방송프로그램 내용 및 편성과 운용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만 보면, 방송평가를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들린다. 법학자들의 말을 빌 것도 없이 법조문의 「할 수 있다」와 「해야 한다」는 다르다.
그러나 같은 법 17조는 방송사업자(중계유선방송사업자 포함)의 재허가시 방송위원회의 방송평가결과를 반드시 반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 결과를 반드시 반영해야 할 방송평가 자체가 없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므로 방송평가도 사실상 강제규정이다.
방송평가의 대상에는 모든 재허가심사 대상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지상파방송사업자,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위성방송사업자, 채널사용사업자, 중계유선방송사업자가 명확하게 포함되고,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종류의 방송사업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유권해석은 방송위원회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다.
방송평가업무는 방송프로그램 내용 및 편성뿐만 아니라, 방송사업자의 운용전반에 대한 평가업무를 다루게 되어, 기존의 방송심의업무보다는 한층 포괄적이다.
방송평가업무의 세가지 영역으로 내용평가, 편성평가, 운용평가를 꼽는다. 그러나, 여기에도 논리적 함정이 있다. 법31조1항의 조문이 「방송사업자의 프로그램 내용 및 편성과 운용」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평가업무는 방송프로그램의 내용·편성·운용만 해당될 뿐이라는 억지주장이 있을 법하다.
「방송운용」이 「방송사의 운용」이라고 강변하던 사람들은 다시 「및」과 「과」라는 연결사의 의미를 핑계삼아 평가대상은 「프로그램운용」이지 「방송사의 운용」은 아니라고 강변할 것이다. 법조문 해석상의 논란을 벌일 수 있으면 방송평가제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업으로 만들 수 있고, 「프로그램운용」은 그 개념적 내용이 공허하므로 평가의 실익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방송위원회로서는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논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논리적 대비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며, 불필요한 논쟁이 생기지 않도록 다음 방송법 개정시에는 조문정정이 불가피하다.
새 방송법이 발효되는 3월 이후에는 문화부의 방송업무가 방송위원회로 이관되므로 방송법 개정안조차 방송위원회가 성안하여 정부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국회에 상정해야 한다.
또한 새 방송법은 방송위원회로 하여금 방송평가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방송평가위원회를 둘 수 있도록 하고, 그 구성과 운용은 방송위원회의 규칙으로 규정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둘 수 있다」는 규정은 임의규정처럼 들린다.
방송평가위원회를 두지 않고 방송위원회가 직접 방송평가업무를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업무량이 많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업무의 성격상 바람직하지도 않다. 오히려 새 방송법이 방송평가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포괄적으로 위임한 것은 이제까지 정부가 실시해 온 형식적이고 자동적인 재허가심사를 방송위원회가 되풀이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새 방송위원회는 곧장 방송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방송평가업무의 조직에 착수해야 한다. 방송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위원회 규칙도 재빨리 제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방송평가의 기준과 절차도 포함되어야 한다.
방송평가제의 궁극적 근거가 재허가 실질심사에 있다고 해도 방송평가업무는 재허가여부를 목적으로 삼기보다 더 높은 정책목표를 지향해서 조직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방송평가와 재허가심사의 목적은 안정적이고 다양한 방송서비스의 공급과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정기적 방송평가를 통하여 허가기간 동안 방송사업자들이 건실하게 방송활동에 임할 수 있게 하고, 재허가여부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도록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요하면 방송활동의 정상화를 위한 자금지원에도 인색할 필요가 없다.
방송평가제의 성공은 재허가심사업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조에 의한 방송평가와 17조에 의한 재허가의 실질심사는 방송위원회의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방송업계의 기초적인 조사자료를 수집하고, 분석결과를 종합하여 방송정책이나 방송지원과 관련되는 사항에 대하여 방송위원회의 정책적 판단과 결정을 묻는 한편, 개별방송사업자에 대한 자료를 별도로 누적하여 허가기간 종료시에 개별방송사에 대한 재허가심사를 수행하여야 한다.
재허가보류 또는 재허가거부도 필요하면 결정하여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새 방송법은 98조에 방송위원회에 자료요청권을 부여하였고, 방송사업자는 의무적으로 재산상황을 방송위원회에 제출토록 규정하였다.
재허가심사는 방송사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방송사업자의 조직적이고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지난 수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방송사업자들이 보여줄 노력의 강도와 수준은 일반인의 상상력을 훨씬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평가제를 두고 노심초사하던 거의 대부분의 대학운용자들에게서 잘 볼 수 있었듯이, 재허가여부와 연결되는 방송평가제에 대한 방송사업자의 불안한 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방송위원회는 재허가심사기준을 사전에 고지하고 방송사업자로 하여금 재허가기준을 숙지하여 시간을 두고 준비할 수 있게 하며, 허가기간 중 주기적으로 방송프로그램 내용 및 편성과 운용에 관한 법정사항과 위원회의 평가규칙에 따른 권고사항을 점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방송위원회의 재허가거부결정에 따른 후속절차도 분명히 해야 한다. 재허가추천 거부시의 이의제기와 행정소송절차, 퇴출되는 방송사업자의 자산과 설비처분, 그리고 방송인력에 대한 배려도 면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방송위원회가 방송평가업무의 구체적 기준과 절차, 그리고 방송평가결과의 반영절차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방송사업자들로 하여금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방송평가제는 지난 10년간 각종 방송정책관련 연구위원회가 권고해 온 사항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새 방송법에 의해 방송위원회의 직무로 제도화되었다.
방송사업자의 방송활동에 대한 종합평가와 재허가 실질심사라는 방송평가제의 과제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 방송위원회와 방송평가제에 거는 사회적 기대가 무척 크다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믿는다.
방송평가제는 새 방송법과 방송위원회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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