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린 산업전자부장 crwon@etnews.co.kr
어느새 「벤처」라는 말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화두로 자리잡았다. 지난 한해 5000여개의 기업이 벤처라는 문패를 달고 세상에 고개를 내밀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이 10개 중에 1개꼴로 성공한다는 벤처기업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하고 있다. 이 벤처기업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오고 있는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그 변화 중에서도 인력충원에 일대 대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대기업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대기업을 기피하고 있는 것. 오히려 벤처로 몰리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아예 대학시절부터 벤처로 나가기 위해 휴학하는 학생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소위 우리 사회의 명문대로 알려져 있는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의 재학생들이 벤처로 가기 위해 중도에 휴학하고 있다.
서울대 공대의 경우 지난 97년 650명(전체의 9.6%)에 불과했던 휴학생이 98년 837명(12.3%), 99년 1267명(18.75%)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학사과정의 휴학생은 지난 97년 122명(전체의 4.9%)에서 99년 174명(7.0%)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에 맞춰 아예 일부 대학교들은 재학생의 창업을 지원하거나 벤처기업체의 실무경험을 학점으로 인정하는 제도 등을 도입, 시행하고 있다. 예전과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기업에 몸담고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속속 벤처기업으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 대기업의 인력담당자는 벤처기업으로 빠져나가는 인력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어떤 대기업의 경우 고육지책으로 부서장에게 인력유출시 인사고과에 반영한다는 압력을 쓰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현재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인력유출을 막을 수는 없는 형편이다. 오히려 인력유출의 범위만 커져가고 있다. 기술개발인력이 주로 나가더니 마케팅과 관리파트의 인력까지 빠져나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모 대기업의 경우 광고마케팅부문의 한팀 중에 대부분이 벤처기업으로 몽땅 옮겨가 업무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이 옮긴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벤처기업으로 옮긴 S사의 모 과장은 『3∼4년이면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했으나 7∼8년 근무해도 과장자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면서 대기업의 인사적체현상을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
이렇다 보니 대기업의 인사관계자들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스톡옵션을 내걸기도 하고 파격적인 인사, 인센티브제 도입 등 다양한 방안을 내고 있다. 어떤 재벌회장은 벤처기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대기업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자업자득인 측면이 강하다.
대기업들은 IMF라는 어려웠던 시절, 하루아침에 종업원들의 책상을 치워버렸다. 생존대책이 마련돼있지 상황에서 회사가 보여준 것은 헌신짝 내던지듯이 임직원들을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았다. 그 당시 남아있는 자나 떠나는 자나 모두 정신적인 공황을 겪어야 했다. IMF의 긴 겨울을 거치면서 회사와 종업원간의 신뢰관계는 무너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벤처기업이 생겨나면서 대기업의 종업원들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런 저변에 깔려있는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벤처기업의 문화를 따라간다고 해서 한번 무너졌던 신뢰관계를 되찾을 수 있겠는가.
벤처기업조직의 핵심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자율성, 진취성, 스톡옵션제를 통한 종업원의 주인의식, 수평적 의사소통, 속도경영, 미국식 해고제도 등은 이미 실리콘밸리의 문화로 대표되는 미국식 벤처기업의 모형이다. 이를 아무런 검증 없이 대기업들이 흉내내는 것도 문제다. 대기업은 벤처기업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종업원들에게 평생직장이라는 신뢰관계를 다시 형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예전처럼 머슴으로 대하기보다는 파트너로 대하면서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구조조정의 대명사로 자주 회자되고 있는 미 GE사의 잭 웰치 회장도 최근 평생직장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다.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다음으로는 꿈을 주는 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조직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변화만을 좇아서는 안된다. 조직은 변화와 함께 안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일본학자는 『기업이 가진 사람과 그들의 지식은 다른 기업이 베낄 수 없다』면서 『입사한 지 10∼15년 된 중간관리자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지금 대기업의 경영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어려웠던 시절 저질렀던 잘못으로 무너져버린 회사와 종업원간의 신뢰관계를 하루빨리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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