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정보통신업계 인물 지도가 바뀌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전자·정보통신업계를 대표하던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하나 둘 무대 뒤로 사라지고 신진 세력들로 간판이 바뀌고 있다.
특히 인터넷 벤처 붐이 온 사회를 열풍처럼 뒤덮고 있는 최근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고 그 저변 역시 예전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전문 경영인, 엔지니어라는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을 거부한다. 성공한 기업가이면서 동시에 대중스타 못지않은 사회적 인기를 누릴 정도로 부와 명성을 한 손에 거머쥐었고 정보화가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면서 단지 산업계를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이끌고 나가는 명실상부한 파워엘리트 그룹으로 성장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디지털사회에서 전자·정보통신업계를 움직이는 스타들은 일종의 「문화권력」을 획득한 권력자들이다. 그들의 사고, 말, 행동양식 하나하나가 시대를 변화시키고 있고 일반인들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정치 권력의 최고봉에는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있지만 지구상에서 최강의 문화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빌 게이츠인 것 처럼.
시대가 인물을 낳았건, 인물이 시대를 이끌었건 분명한 것 한가지는 전자·정보통신분야에 몸담고 있는 스타들의 부침은 우리 산업 구조를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전자산업의 씨를 뿌리고 가꿔 온 소위 1세대 인물들은 극히 한정적이었고 그 사회적 영향력 역시 제한적이었다. 가장 큰 공헌자이면서도 어쩌면 가장 대접받지 못한 세대들이었다.
이들은 이제 원로라고 불린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세계 1위로 끌어 올린 강진구, 김광호 전 삼성전자 회장, 가전산업의 대명사였던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 부품업계의 산증인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신화를 창조한 서정욱 과기부 장관과 정장호 정보통신진흥협회장, 정보화의 밑거름을 뿌린 이용태 정보산업연합회장 등이 그들이다.
그들에겐 뚜렷한 공통점이 별로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일에 대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비전, 목표에 대한 집착 뿐이었다. 밤을 새워가며 제품을 개발, 생산해 한국 전자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는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창업형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들도 불도저같은 추진력, 카리스마에 가까운 장악력 등과 관련한 전설적 이야기만 남았다.
80년대부터 소위 정보기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외국계 기업이 한국에 대거 진출하면서 전자산업의 지평이 넓어졌고 새로운 인물군이 충원되기 시작했다. 김상배 씨가 한국인으로는 외국 메이저 IT업체(오토데스크)의 아태지역 책임자에 처음으로 오른 「사건」이 발생한 것도 이 때였다. 이 당시 등장한 IT업계의 스타들은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병제 한국오라클 사장, 이범천 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사장, 김일호 오토데스크 사장, 김동식 전 케이던스 사장, 한성수 전 로터스 사장 등이 주목받았다.
외국계 IT업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역시 IBM, HP 등이었고 국내 업체로는 삼성전자·다우기술 등이 가세했다. 출신 고교별로는 경복고·서울고·경기고 동문이 파워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외국계 기업의 스타들은 뛰어난 영어실력은 물론 합리적 사고, 유연한 경영전략, 세련된 매너 등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장 접근해 있는 인물군으로 평가된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는 벤처의 싹이 돋았다. 이찬진이라는 서울공대 출신의 20대 청년은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개발,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벤처기업인으로 떠올랐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은 인하공대 재학중 창업, 우리나라 벤처 제1호라는 「증명서」를 받았다.
이들은 그 상징성 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 사장은 드림위즈라는 인터넷업체를 세웠고 조 사장은 비트컴퓨터를 코스닥시장의 초우량기업으로 키워냈다.
특히 아래아한글 개발 및 보급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던 일단의 인물들은 그 후 차례로 독립, 새로운 벤처를 세우면서 후에 「한컴파」로 불릴 정도로 국내 소프트웨어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흥호 나모인터랙티브 사장, 장영승 나눔기술 사장, 국내 최대의 온라인 게임업체인 NC소프트의 김택진 사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장영승 사장은 서울대 운동권 출신이면서 벤처기업가로 변신했다고 해서 화제를 몰고 다녔다. 이들은 소위 모래시계 세대인 386세대로 분류되면서 업계의 젊은피로 불렸다. 한뫼소프트 강태진 전 사장, 핸디소프트 안영경 사장 등도 벤처 사업가로 급부상했다.
이찬진 사장 후임으로 한글과컴퓨터의 경영을 맡은 전하진 현사장은 「국민기업」 한컴을 위기에서 구해 낸 뛰어난 소방수로 각광받았다. 전 사장은 한컴 회생 이후 인터넷 사업을 의욕적으로 펼치고 있다.
또 다른 일단의 벤처 스타군은 KAIST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린 전길남 교수 밑에서 수학했던 당대의 엘리트 젊은이들, 박현제·허진호·정철 박사 등이 기업에 뛰어든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삼보컴퓨터를 모태로 현장에 몸을 담았다. 아예 기업을 차리는 쪽을 택했던 이찬진 사장이나 조현정 사장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국내 벤처기업의 효시로 불리는 삼보컴퓨터에 대한 매력과 이용태 회장의 각별한 애정을 받으면서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정철 박사는 삼보의 자회사에서 한글글꼴을 개발하는 등 이름을 날리다가 얼마 전부터는 삼보컴퓨터의 부사장으로 임명돼 저가PC인 e머신즈 돌풍을 일으키는 데 성공,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허진호 박사는 인터넷서비스업체인 아이네트를 맡아 국내 최대 ISP로 키웠고 박현제 박사는 솔빛미디어를 맡은 후 지금은 메타랜드의 부사장으로 옮겼다.
정 박사는 KAIST 후배인 이민호 박사(전 중앙일보 기자)와 함께 최근에는 삼보컴퓨터 그룹의 인터넷 전략을 다듬고 있다.
KAIST는 이들 말고도 이민화 메디슨 사장과 장흥순 터보테크 사장이라는 걸출한 벤처 기업가를 배출했다. 이 사장은 의료진단기기분야에선 세계 최고로 꼽히는 메디슨 신화를 창조, 이제는 벤처협회장을 맡고 있다.
벤처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이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는 안철수 박사와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이다. 서울의대를 나온 안철수 씨는 인체의 병을 고치는 평범한 의사의 길을 버리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는 순수 국내 기술로 수십 종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 무료로 공급, 컴퓨터 슈바이처로 불린다. 안 박사는 전자신문이 조사한 네티즌 선정, 한국의 정보통신인 1위에 오르기도 했고 중앙일간지 및 방송사 기자들이 선정한 99년 올해의 정보통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문술 회장은 나이 마흔이 넘어 젊은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벤처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신화를 일구어 낸 사람이다. 국가 공무원 생활을 접고 반도체 장비제조업체인 미래산업을 설립하고 20대보다 더 통통튀는 경영기법과 아이디어를 동원, 동종 업계 정상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그는 인터넷업체인 라이코스와 제휴, 한국 라이코스를 만드는 등 지금도 정력적인 벤처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벤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닥치면서 숱한 스타들이 시장을 장악했다. 삐삐 삼총사로 불리면서 일약 벤처신화를 만들어 낸 박병엽 팬택 사장, 이가형 어필텔레콤 사장, 김동연 텔슨전자 사장 등이 유명세를 탔다.
이들은 삐삐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CDMA 기술을 앞세워 이동전화 단말기 업체로 변신을 시도했고 다국적 기업인 모토로라와의 제휴에 성공,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박 사장과 이 사장(중동고)은 고교 선후배 사이로 알려진 것도 이채롭다.
인터넷 세상은 파워 엘리트의 연령적 개념까지 파괴했다. 속도가 생명인 인터넷답게 이 시장에서는 386도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토종 포털 1, 2위를 다투는 다음의 이재웅 사장과 네이버컴의 이해진 사장은 30세도 되기 전에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로 등극했다. 두 이 사장은 연세대 전자공학과 86학번 동기동창이어서 한국의 포털사이트는 연대가 좌지우지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코스닥 공모가를 무려 150만원대로 책정, 재계를 놀라게 한 네오위즈 나성균 사장은 이보다 한술 더떠 서울공대 90학번이다.
오상수 새롬기술 사장도 인터넷 스타다. 새롬데이타맨 프로라는 통신 프로그램을 개발, 네티즌의 사랑을 받아 온 새롬기술은 미국내 자회사인 다이얼패드가 무료 인터넷 전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김진호 골드뱅크 사장과 이기형 인터파크 사장도 인터넷 벤처 신드롬을 일으킨 주인공이고 보이스메시징 개념을 도입한 김형순 로커스 사장은 코스닥 상장 후 주식 가치가 어지간한 재벌 총수보다 많아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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