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세기에 「디지털 경제」와 「지식사회」라는 말로 지칭하던 새 천년이 시작됐다. 20세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상상하기도 벅찬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바로 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엇인가 거대한 변화를 기대한다면 이제 그 기대를 접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과거는 모두 떠나버렸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잠시 주변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늦지는 않은 시점이다. 무엇보다 변화를 스스로 이끌어가겠다는 의지와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새 천년에도 우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후발주자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세계 경제의 화두는 「디지털」이었다. 경쟁력의 원천인 「정보」가 정보기술(IT)의 급격한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로 생성, 전송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 천년에는 정보의 디지털화가 더욱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고 정보가 새로운 경쟁력의 근원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면 정보기술은 기업경영의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가 될 것이다. 정보기술 인프라 구축은 전세계적으로 이미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살펴볼 때 국내 기업들에 IT는 단순히 전산화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IT를 단순히 업무 전산화나 자동화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정보 흐름을 근본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업무 자체를 새롭게 재구축한다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BC방송이 미국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성공적인 경영자라고 칭찬한 바 있는 컴퓨터어소시에이츠(CA)의 찰스 왕 회장은 기업 내부에서 최고경영자(CEO)와 기술담당최고중역(CIO)의 대화 단절이란 표현으로 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 대화하지 않는다. 단지 말을 할 뿐』이라며 CEO들은 CIO를 「기술쟁이」로, CIO들은 CEO를 시대에 뒤떨어진 「무식쟁이」로 각각 대한다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 담당부서나 담당자를 업무의 한 부서나 쟁이 정도로 취급하기보다 경영전반에 필수적인 전략부서나 경영전략가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IT 인프라 구축은 새 천년 디지털 경영체제 구축의 시작인 것이다. 디지털 경영체제란 한마디로 「속도」와의 전쟁체제라 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GE의 잭 웰치 등 앞서가는 기업들의 리더들은 조금씩 다른 표현과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디지털 경영의 화두로 한결같이 속도를 강조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기업의 성패는 「디지털화된 신경망」을 갖추고 시장변화에 얼마나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것으로 압축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기업은 시장변화 정보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신속하게 반응하는 「반응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다.
「웰치즘」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선진경영 기법의 바로미터로 꼽히는 잭 웰치 회장도 『1, 2위가 아닌 사업에서는 손을 떼라. 경영의 생명은 속도』라며 「넘버 원 또는 넘버 투」 전략을 강조했다. 속도의 중요성에서 두 거인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다. 생각해볼 문제다.
지난해 한국통신프리텔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과 총 6억달러 규모의 제휴를 맺은 바 있다. 당시 제휴업무를 책임졌던 협상 실무자는 『무엇보다 놀란 것은 세계적인 기업의 신속한 의사결정 과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거금의 외자를 유치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과정에서 외국 거대기업들이 보여준 업무 처리속도에 놀랐다는 것이다. 그는 『몇단계를 거쳐 오르내리는 국내 기업들의 상명하달식 의사전달 체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을 따라갈 수 없겠구나』는 생각을 뼈저리게 했다고 고백했다.
최근 외국에서 투자를 유치한 한 벤처기업의 사장은 『3개월, 늦어도 6개월이면 시장 지배구조가 바뀔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국내 대기업들의 의사결정은 3개월 이상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그렇게 오랜 기간을 숙고하고도 위험부담은 오히려 벤처기업에 떠넘기는 「리스크 제로」 결정을 내린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요인은 업무담당자의 소신있는 판단과 이를 당연히 생각하는 조직의 체질도 한몫한다. 이제는 기업간 업무연락을 최고담당자간 전자우편으로 주고받는 시대다. 이러한 때 몇단계를 거쳐 비서를 통해 결재서류를 전달받는 기업풍토에서는 경쟁력 확보를 기대할 수 없다. 소신있는 업무처리를 위해 담당자의 전문성 확보와 함께 책임과 권한을 충분히 부여하는 최고경영자의 마인드 변화가 중요한 시점이다. 이는 또 디지털 경영체제란 인간중심의 경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최고로 성공한 외국계 IT기업으로 꼽히는 한국오라클의 강병제 사장은 최근 본지와 가진 설립 1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기업은 최고 자산인 사람 중심으로 운영돼야 하며 이를 경영자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는 말로 한국오라클의 성공 비결을 대신하기도 했다. 직원을 믿고 최고의 자산이 인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경쟁력 확보에서 빠질 수 없는 요건이라는 것이다. 그의 인간중심 경영철학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회사 설립초기 새로 채용한 한 경력직원이 출근 며칠 후 면담을 요청해왔다. 뽑아놓고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니 답답해하다가 뭘 해야 하는지 지시를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강 사장과 그 직원의 대화 한토막.
『당신 어느 부서에 있지?』
『고객지원 부서에 있습니다.』
『고객지원 부서가 뭐하는 곳인데?』
『고객을 지원하는 부서입니다.』
『잘 알면서 뭘 해야 되는질 왜 나한테 물어보나?』
그는 국내 기업들이 똑똑한 인재들을 싹 쓸어가서는 한결같이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키는 일만 잘하는 머슴만을 양성하고 있다는 질책이다.
디지털 경영이란 또 오너가 없는 경영을 뜻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열성을 다해 일해줄 조직원들은 없다. 최고 경영자 스스로가 투명경영을 통해 직원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결과는 자명해진다는 것도 디지털 경영시대의 철칙인 것이다.
최근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고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한 벤처기업 사장의 고백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동안 개인적 욕심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조직원이 무조건 나를 믿고 따라와줄 것으로 생각했던 게 오판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 욕심을 버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렸더니 사람들이 주변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디지털 경영시대는 또 다른 말로 지식경영의 시대로 해석할 수 있다. 지식경영이란 여러 가지 해석과 설명이 필요한 말이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보의 공유」가 이루어지는 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의 공유란 단순히 IT시스템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나 지식을 함께 공유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지식경영의 핵심요소인 것이다. 그래서 최고경영자가 솔선해 스스로 모든 것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마인드의 대변화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디지털 경영시대의 경쟁력은 결국 정보공유를 통해 뭉쳐진 새로운 지식집단이 좌우할 것이다. 이 지식집단은 첨단 IT인프라를 기반으로 정보를 공유해 전문성을 키워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소신있는 의사결정이 가능한 지식근로자들로 구성된 것이다. 지식집단으로 변신한 신정보군단에 의해 산업사회의 거함들이 무참히 격파당하는 시대가 바로 디지털경영 시대, 즉 지식사회인 것이다.
김상범기자 sb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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