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킬러 애플리케이션 (72);기업내부의 재정의 (3)

　어떤 기업들은 아예 정보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설령 있다 해도 규제완화나 킬러앱의 도입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크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석기술 설계자 네이던 마이어볼드는 현금이나 수표, 신용카드를 훌륭히 대체할 뿐 아니라 비 은행기관에서도 쉽게 제공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의 사용이 확산되면 은행(최소한 상업은행)들은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금과 금융수단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자신들의 가치를 교환 -즉 염소와 땅을 교환한다든가 고객이 한 항공사를 이용했을 때 마일리지 점수를 부여하는 것 등 -하기 위해 지불하는 거래비용을 줄여줄 목적으로 정부와 은행이 만들어낸 기술이다. 그리고 이 같은 거래비용은 정보의 흐름이 개선되면서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

　매출의 80% 이상을 생활정보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신문사들도 은행과 사정은 비슷하다. 인쇄형태의 생활정보 광고는 야후나 디지털시티 등과 같이 디지털 형태로 제공되는 다양한 지역안내에 비하면 거의 쓸모가 없다. 한 대형투자은행의 최고경영자는 자신의 회사가 처한 상황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투자은행이나 중개인을 왜 필요로 하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에겐 충분한 정보가 없거나 원하는 것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은 사람들에게 그 정보와 수단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술이 바로 우리 같은 사업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의 중개인이 되는 셈이죠.』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자산이 없어지고 있다는 냉엄한 진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수백만장의 증권관련 문서와 분기별 보고서 인쇄로 연간 10억원 규모의 특수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금융분야 인쇄산업은 겉으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인쇄산업은 1980년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저가 가정용 컴퓨터에서도 거뜬히 작동하는 전자출판 소프트웨어들이 대거 상용화 되면서 한때 문서 제작에서 고수익을 가져다 주었던 식자기(Typesetting)와 사진 부착술 등의 필요성이 일시에 줄어들었다.

　1995년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인쇄형태의 보고서 접수를 피하기 위해 이듬해부터 기업들이 전자 정보수집, 분석, 조회(EDGAR:Electronic Data Gathering, Analysis, Retrieval)시스템을 통해서도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폭탄선언을 했다. 금융분야 인쇄산업에도 킬러앱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인쇄산업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번창했다. 금융분야 인쇄업체들은 전자문서 시장 경쟁자들의 경우 고정자산이 필요없다는 것과 새로운 세계에서는 고정자산의 없음이 걸림돌이 아니라 득이 된다는 사실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들의 전략은 적중했다. 금융인쇄 분야 선두업체 중 하나인 바운&컴퍼니(Bowne & Company)는 온라인 보고서 제출이 허용되던 그 달에 EDGAR시스템을 통한 서류제출의 15%를 수주했다.

　첫 온라인 보고서 제출에서 금융인쇄 업체들의 비중은 무려 40%를 웃돌았다. 바운은 사업영역을 지면 인쇄뿐만 아니라 온라인, 월드와이드웹 등으로 넓혀 나갔다. 가만히 앉아 잡아먹히기보다 과감하게 디지털 기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업확장에 적극 이용한 결과다.

　금융인쇄 업체들에 중요한 것은 설비가 아니었다. 복잡한 정부관련 서류제출에 대한 전문지식, 빠듯하고 엄격한 마감일정에 맞출 수 있는 업무능력, 그리고 기밀정보를 신중하게 취급하는 데서 얻은 명성이 무기였다. 그들에겐 브랜드가 있었다.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설비가 아니라 바로 이 브랜드야말로 인쇄업체들이 디지털 세계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자산인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