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빌 게이츠는 없다

서현진 기획취재부장

 『빌 게이츠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미국의 빌 게이츠가 서울에 왔을 때의 일이다. 수백명의 기자들이 참석한 공식회견장에서 그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

 『요즘은 프로그램 짜는 일을 하루에 몇시간 정도나 합니까?』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간단명료하게 받아넘기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빌 게이츠였지만 이때만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통역의 보충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는 이렇게 답했다. 『프로그래밍요? 굉장히 해보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문법도 잘 몰라서….』 우문현답을 알아차린 참석자들 사이에서 쓴웃음이 흘렀다.

 지난 96년 빌 게이츠가 다시 서울에 와 공식회견을 열었다. 5년 전에 비해 조금은 구체적인 질문 하나가 나왔다.

 『폴 앨런이 기술 지향적이었던 데 반해 당신은 마케팅 지향적인 경영자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도 당신의 마케팅 감각에 의존한 바 크다고 생각하는데….』 빌 게이츠는 지체하지 않고 즉석에서 답했다.

 『그 반대지요. 폴은 탁월한 전략가입니다. 그는 창업 때부터 마케팅 우위를 주장했고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을까에만 골몰했지요. 폴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떠나서도 계속 그 길을 갔고 나 역시 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쓴읏음은 없었다. 대신 질문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난해 IMF 때, 그리고 새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벤처기업가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 빌 게이츠가 또다시 서울에 왔다. 청와대를 방문한 그에게 대통령은 『미국 땅 전부를 가질래, (벤처기업가 출신인) 빌 게이츠를 가질래 하면 당신을 선택하겠다』며 극찬을 했다. 대통령이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묻자 그는 미국의 예를 들면서 『환경조성』이라고 말했다.

 그가 떠난 후 대통령은 각료들에게 한국판 빌 게이츠 육성을 위한 「환경조성」을 지시했다. 이때가 98년 6월, 여러 환경조성책들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는 2000 몇년까지 벤처기업 몇천개를 보육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신생기업들이 벤처를 내세우면 얼마간의 예산이 지원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벤처를 주장하는 기업들이 하루에 수십개씩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지난 여름 만난 30대 중반의 한 개원 의사는 『마음이 몹시 흔들린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라며 벤처기업을 창업하겠다는 것이었고 의사와 변호사 등 상당수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때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빌 게이츠 정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집중되는 때』라고 했다. 그는 대학때 여분으로 배워둔 프로그래밍 기술을 밑천으로 빌 게이츠와 같은 억만장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접지 않았다.

 지난해 「일본판 빌 게이츠」 손정의가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벤처의 성공 가능성은 전혀 예측불허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할 일은 자금지원과 판로개척이 아니라 성공적인 벤처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조기 인터넷교육을 하거나 규제를 크게 완화하는 것 등이지요.』

 미국의 빌 게이츠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경쟁자와 심지어 정부와 싸우느라 편할 날이 없습니다. 틈나면 1만5000여 직원들의 전자우편을 검색하며 아이디어를 찾고 그러다가 고객이 나를 찾으면 달려갑니다. 취미로 게임소프트웨어를 짜보고 싶은데 내 생활이 거의 없어요. 또 세계 제1의 부자라고 하지만 나는 내가 벌어놓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계획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빌 게이츠 정책도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 수천명 중 단 한사람만이라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투쟁하며 스스로 내성을 길러나갈줄 아는 기업가가 선망의 대상이 돼야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까지의 빌 게이츠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자성론도 한번쯤은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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