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그간 논란을 빚어 왔던 제조물책임(PL:Products Liability)법을 결국 조기 실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해부터 소비자단체들의 건의로 PL법 도입을 적극 추진해 왔던 재정경제부는 최근 산업자원부 등 관련부처와 법 제정 및 시행시기에 대한 이견을 좁혀 내부적으로 유예기간 1년을 거쳐 오는 2001년부터 PL법을 시행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방침만 놓고 보면 소비자보호원 등 소비자단체들이 주장했던 조기 도입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PL법 도입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초 100대 과제의 하나로 공약했던 사안으로 당초 지난해 이 법을 제정, 내년부터 시행하는 문제를 검토한 바 있는 정부가 올해 초 발표한 소비자보호시책을 통해 PL법 시행시기를 2002년 또는 2003년으로 잡았던 점 등을 감안하면 정부가 이의 시행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물론 PL법 시행시기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정부의 계획대로 늦어도 내달 말까지 PL법안을 마련, 올 가을 정기국회에 상정한다 해도 원안대로 통과될지가 우선 불투명하고 산업계의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전자·정보통신업계의 경우 엊그제 정덕구 산자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 PL법 시행이 업계에 부담을 가중시키고 분쟁해결기구 미비, PL보험제도 취약, 관련 전문인력 부족 등 제도적 준비가 미흡한 상태여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며 법 제정 및 시행을 각각 1년씩 연장할 것을 건의하는 등 산업계의 연기 주장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계 특히 전자업계에서 지속적으로 PL법 도입 연기를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법이 제품결함만 있으면 제조와 유통과정에서 발생한 기업의 과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소비자들이 피해보상을 신청할 수 있어 자칫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감에서다.
게다가 이에 따른 소송비·배상비·보험료 등 적잖은 사전 준비비용을 수반해 기업경영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이를 상품가격에 전가할 경우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PL법 제정 및 시행을 무조건 반대해서도 안된다. PL법이 시행되면 소비자의 권익보호가 크게 강화되는 것은 물론 국산제품의 품질 및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일본 등 PL법을 이미 도입한 국가에 우리나라 업체들이 제품을 수출할 경우 현지의 관련법 적용을 받으면서 이들 국가에서 수입·판매하는 제품에 대해 결함이 있더라도 보상을 받지 못하면 분명 모순이 있다.
국내 시장이 완전 개방된 상황에서 수입품에 대한 소비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등의 이점이 있으므로 PL법 도입을 더 이상 늦출 필요가 없다는 측면도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PL법 도입에 앞서 먼저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또 앞으로 늘어날 각종 소송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완비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기술개발을 우선시하는 중소기업, 특히 벤처기업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큰 만큼 이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전자업체 등 산업계도 PL법 도입이 단기적으로 원가상승 부담을 주고 비생산적 클레임 처리업무가 늘어나기는 하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제품 결함 최소화를 위한 연구개발 강화와 제품 품질향상 노력에 따라 국제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 무조건적 시행연기는 자제해야 한다. 우리 경제가 공급자 위주에서 소비자 위주로 바뀌고 있는 점을 인식,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튼 도입시기가 정해진 만큼 이제 논의의 초점은 법안에 모아져야 한다.
현재의 어려운 여건 아래서 높은 제조비용으로 성장잠재력을 잃어가고 있는 국내 제조업체들의 어려운 실정을 감안, 배상한도액 설정·책임기한 등 법 시행과 동시에 기업과 소비자들의 마찰이 예상되는 법 조문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의욕이 지나쳐 현실과는 동떨어진 선언적 의미만이 부각된 법조문을 만들어 놓아선 안된다. 소비자 보호의 이상과 기업현실을 조화시킨 균형 있고 실효성 있는 PL법 제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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