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14);제 2부 산업의 태동 (5)

경제기획원과 경제개발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는 단순한 정치권력의 이동뿐 아니라 끝없는 「경제 쿠데타」의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혁명정부는 빈곤의 퇴치를 업적 정통성의 절대적 기반으로 인식하고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 나갔다. 그러나 합리성이 결여된 군대식의 개혁은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연출하게 되자, 혁명정부의 과단성과 관료적 합리성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었다. 혁명정부는 그 정치적 수임자로서 경제기획원(EPB)을 창립한 것이다.』 <이만희 저, 「EPB는 경제기적을 낳았는가」의 머리말에서>

 경제기획원의 신설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의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라는 경제 쿠데타는 경제기획원이 주동했고 전자산업의 육성은 쿠데타의 가장 중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였다.

 경제기획원 신설이나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은 원래 제2공화국, 더 나아가서는 제1공화국 말기부터 구상해 오던 것들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한국전쟁에 대한 피해복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57년이었다. 이 해 송인상(宋仁相) 부흥부(復興部)장관은 이승만(李承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산하기구로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1962년)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년)을 잇따라 내놓았다. 이런 계획들은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이 재건(Rehabilization)에서 개발(Development)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계획들은 유솜(USOM) 원조에 길들여져 있고 경제개발계획 자체에 부정적 시각을 보였던 자유당 정부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그 추진 바통을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출범한 제2공화국에 넘겨졌다. 그러나 출범 후 내내 정치 리더십 부족에 시달렸던 민주당 정부는 경제개발을 전담할 경제개발부(經濟開發部)의 신설방안을 마련해 놓고도 재원부족과 민심안정이 급선무라는 이유로 계획 자체를 유보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장될 뻔했던 제2공화국의 방안들은 곧 바로 들어선 5·16군사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1961년 5월 26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우선 혁명내각을 구성하면서 기존 부흥부를 확대 개편한 건설부(建設部, 영문명칭은 Ministry of Development)를 출범시켰다. 이로부터 두달 뒤인 1961년 7월 22일 건설부는 재무부의 예산기능(예산국)과 내무부의 통계기능(통계국)을 흡수하여 경제기획원으로 재출범하게 됐다. 출범 당시 경제기획원은 종합기획국·예산국·물동기획국·통계국 등과 외청으로 국토건설청을 두고 있었다.

 경제기획원은 정부의 경제기획기능이 기획처와 부흥부 등에 분산돼 있어 강력한 정책 집행이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신설된 일종의 수석경제기구(Super Ministry)였다. 이 수석경제기구는 앞서 흩어져 있던 경제행정기구들을 중앙집권화함으로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경제권력의 발판을 다졌다.

 1960년대 초반 이같은 수석경제기구의 신설을 주장하거나 출범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들로는 송정범(宋正範, 1961년 부흥부 기획국장), 이기홍(李起鴻, 1960년 부흥부 기획국장), 이한빈(李漢彬, 1960년 재무부 예산국장), 정재석(丁渽錫, 부흥부 기획과장), 송요찬(宋堯讚, 1961년 내각 수반), 신태환(申泰煥, 1961년 건설부 장관), 박기석(朴基錫, 1961년 혁명내각 부흥부 장관), 김영선(金永善, 1960년 재무부 장관) 등을 꼽을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을 원칙적으로 반대했던 김유택(金裕澤)은 초대 경제기획원장에 보임됐다.

 경제기획원을 출범시킨 군사정부는 1962년 1월 13일 기존의 민주당 정부안을 수정보완한 경제개발계획의 전모를 발표했다. 이어 2월 15일에는 자립달성의 기반구축을 위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할 것이라고 국내외에 천명했다.

 제1차 계획의 기조는 개발 연대의 시작과 함께 제도적 기반의 정비였다. 그 핵심은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기초산업의 육성, 소비재 수입의 대체 등을 통해 주요 애로 부문을 타개하는 것이었다. 전력(電力)을 위시해서 비료·섬유·시멘트 분야가 주요 성장산업으로 지목됐다. 제1차 계획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은 6개항이었다.

 1. 농업 생산력의 확대에 의한 농업소득의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의 시정

 2. 전력·석탄 등 에너지원의 확보

 3.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4. 유휴(遊休)자원의 활용, 특히 고용의 증대와 국토의 보전 및 개발

 5. 수출 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6. 기술의 진흥

 제1차 계획의 추진결과는 목표보다 1.4%포인트가 높은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함으로써 국내외를 놀라게 했다. 1960년 82달러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26달러로 증가했다. 제1차 계획에서 괄목 성장한 부문은 단연 2차 산업이었다. GNP 구성비율에서 15.4%이던 것이 20.2%로 높아졌다. 2차 산업의 성장요인으로는 수입대체 및 수출산업의 집중육성, 외자 제조업 투자집중, 전력·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의 증대 등 세가지였다.

 전자산업 발전에 영향을 끼친 측면에서 본다면 제1차 때보다는 사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추진된 제2차 때가 훨씬 지대했다. 제2차 기간인 1969년에 제정 공포된 「전자공업진흥법」이 바로 산업진흥의 직접적인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와 경제 전반의 인프라 구축에 전력 투구했던 제1차 계획은 전자산업의 기반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1차 계획 추진과정에서 전자산업의 기반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외자도입 관련법의 강화 조치였다. 그 핵심은 자유당 시절에 만들어졌으나 유명무실하던 외자관리법과 외자도입촉진법을 실제로 운용할 수 있도록 운용세칙을 제정한 것이었다. 전자산업의 태동이 어차피 외국기술과 외자유치에 의해 비롯됐던 만큼 외자도입촉진법의 강화는 큰 의미를 가졌다. 이전까지 외자는 대부분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원조 수입이어서 계획적인 투자가 불가능했다.

 1961년 12월 15일 공포된 외자도입촉진법의 세칙으로서 외자도입 운용방침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외자도입 원칙에 대한 대강(大綱)이었다. 경제기획원은 이 방침에서 선의의 외국자본의 무제한 도입을 허용했고 특혜와 차별성을 배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가 도입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기간산업용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 투자·과실송금에서의 공정환율 적용 등도 명시했다. 나아가서는 민간차관과 민간외자는 전기·전자 등 2차 산업에 중점 배분할 것, 경제개발계획에 책정된 사업 및 국민경제발전에 기여도가 큰 사업에 우선 순위를 둘 것 등 운용방침도 함께 제시했다. 외국자본 유입에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분위기로 볼 때 이같은 방침은 한마디로 파격적이었다.

 외자도입 운용방침은 그러나 경험부족으로 한가지 결정적인 시행착오를 거쳤다. 경제개발 계획추진에 대한 사명감과 산업재원의 절대 부족이라는 서로 상반된 명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던 경제기획원은 외자도입에 있어 일종의 「다다익선(多多益善)」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산업자본 확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입 자본의 성격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리스크가 적은 외국인 투자보다는 유입이 쉬운 차관도입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국제개발은행(IBRD)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이 제공하는 차관유입이 많았다는 것은 외자도입 기업의 원리금 및 이자 상환부담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다익선 외자도입정책은 이른바 「차관망국론(借款亡國論)」을 낳기도 했다. 한 신문은 한국은행 자료를 인용, 차관에 대한 금융부담 실태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연도별 원리금 상환계획이 65년 1460만불, 66년 1880만불, 67년 2530만불, 68년 2540만불, 69년 2331만불, 70년 1820만불인 반면 지불보증 외환보유고는 2000만불로서 외환사정이 위협을 받고 있다.』 <서울경제신문 1965년 7월 8일자>

 뒤늦게 이를 간파한 경제기획원은 1966년 합리적인 외자도입 및 사후관리와 금융부담이 적은 외국인의 직접투자를 유도하는 외자도입법 제정을 통해 외자도입 운용방침을 자동 폐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이 위원장이 되는 외자도입심사위원회가 설치된 것도 이때였다.(1973년 외자도입법 개정 때 재무부 소관이 됐음.)

 하지만 외자도입 운용방침은 전기·전자분야에서 황무지와 같았던 이 땅에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많은 다국적기업들의 진출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방침의 적용이 계기가 돼 100% 단독투자 또는 합작투자 형태로 한국에 진출한 기업들로는 1960년대 말까지 로열 팩(Royal Pac), 코미(Komy Corp.), 산요전기(三洋電機), 일본전기(NEC), 페어차일드(Fairchild Semiconductor), 시그네틱스(Signetics Corp.), 모토롤러(Motorola), 컨트롤데이터(CDC), 도시바전기(東芝電氣), 스미토모상사(住友商事) 등 미국과 일본계 다국적기업들을 꼽을 수가 있다. 이들 기업은 결과적으로 풍부한 자본과 첨단 기술을 토대로 초창기 한국의 전자산업 기반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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