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품업체들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구축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부품업체들이 따라와줘야 말이죠. 시도는 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인터넷 공개구매요. 그게 뭡니까. 지금까지 인터넷 없이도 잘 해왔는데요.』 전기·전자업계는 보수성이 강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풍토다.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다. 모든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인터넷이지만 이 분야에서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부품을 공급받아 가전제품·사무용기기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지난 97년경부터 인터넷 전자상거래를 추진해오고 있다. 인터넷 공개구매가 그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각 사업부를 통해 개별적으로 행해왔던 구매를 인터넷으로 일원화하자는 것이다. 사업부간 정보를 공유하고 이중적인 인력낭비를 줄이자는 게 그 목표다.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기업의 물품 구매·조달 환경에 변화를 준다. 인터넷 공개구매의 효과는 상당하다. 구매자는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 양질의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다. 공급자도 이익을 얻는다. 자신의 공급가격을 해당업체의 인터넷 구매시스템에 제시한 뒤 낙찰여부만 확인하면 된다. 일일이 해당업체의 구매 담당자를 찾아가 입찰예정가를 알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공급자와 구매자 모두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별무소득이다. 한 가전업체는 97년 인터넷 공개구매 제도를 도입한 이후 지난해 말까지도 성사된 사례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업체도 철저한 사전준비 끝에 지난해부터 이를 시행해왔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부품업체들의 마인드 부족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부품업체들이 인터넷 사용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지적이다. 부품업체들은 전통적인 대면방식의 영업을 선호한다.
인터넷이 편하다는 것은 알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부품업체의 한 관계자는 『왠지 미덥지가 못합니다. 사람을 만나 이것저것 얘기하며 비즈니스를 진행하면 안될 일도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딱딱하죠』라고 말한다. 그렇다보니 부품업체의 인터넷에는 녹이 슬 수밖에 없다.
아예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업체들도 많다. 인터넷 전용회선은 물론이고 사내 네트워크가 마련돼 있지 않은 곳도 허다하다. 사내 네트워크가 없는 곳은 모뎀으로 접속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인터넷 접속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인터넷을 포기하고 만다. 부품업체는 대부분 영세한 규모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 전산 담당 직원이 없다. 중요한 것은 「생산성 향상」이지 전산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설부족이다.
이와 함께 완성품업체들 역시 완벽한 인터넷 공동구매 환경을 갖춰놓지 못하고 있다. 구매의 단일화라는 당초의 취지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각 부서간 정보 공유가 이뤄져야 한다.
사내 데이터베이스와 공개구매 데이터베이스를 연동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의 가공이 필요하다. 업무중복이다.
인터넷 공동구매가 지향하는 경비절감의 목표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각 사업부가 초기 인터넷 공동구매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사그라드는 이유다. 결국 전통적인 구매방식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다품종 대량생산」이라는 부품업계 특성도 인터넷 공동구매의 정착을 막고 있는 한 요인이다. 부품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규격별로 하면 수배로 늘어난다. 한 번에 필요한 만큼 주문을 내려면 부품의 종류·특성·규격 등을 모두 꿰차고 있어야 한다.
수십년 종사한 부품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면 쉽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렇지 않다. 부품업체 관계자들은 『인터넷으로 상황을 파악하더라도 직접 만나거나 최소한 전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심이 안된다는 얘기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완성품·부품업계의 인터넷 공개구매는 도입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다. 대외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인터넷 공동구매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전·사무기기 분야 시장은 치열한 경쟁에 노출돼 있다. 제품 성능의 향상은 물론 가격경쟁 또한 만만치 않다. 전문가들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생산성 향상 운동이나 조직슬림화 조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설비자동화나 비용절감 노력 등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해외업체들도 이미 시행하고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가능한 모든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인터넷 공개구매 제도도 하루빨리 정착시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인터넷 공개구매는 구매방식의 고도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국가 전체적으로 표준화의 완성을 뜻한다. 표준화는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원의 낭비를 줄여준다.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는 저절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다시 인터넷 공개구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현상은 그래서 긍정적이다. 반도체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제공하고 있는 웹사이트도 최근 개설됐다. 한국CALS/EC협회의 「일렉트로피아」 구축 시도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지난해 중반 발족한 후 업체들의 참여부족으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일렉트로피아가 최근들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일렉트로피아가 추구하는 것은 전 업종별 전자상거래.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취지다. 국내 8개 주요 산업분야 가운데 가장 취약한 곳은 전기·전자 업종. 특히 부품 조달·구매는 해외업체와 비교할 때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분야다.
일렉트로피아는 이를 상당부분 보완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협회는 전자 4사와 시스템통합(SI)업체들과 협력체제를 구축, 일렉트로피아를 구축할 예정이다. 국내 전기·전자업체들의 해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이일주기자 forextra@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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