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LG생산기술원 책임연구원
공간이란 사람들에게 삶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부와 권력의 원천이 되어왔다. 전통시대에는 토지가 바로 부의 척도였으며 요즘도 「강남에 살고 있다」나 「강북에 살고 있다」 혹은 「몇 평짜리에 산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간은 산업혁명 이후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힘입어 점점 축소되고 있어 요즘은 지구를 마을에 비유한 「지구촌」이라는 말도 전혀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공간의 압축은 최근 정보통신혁명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글로벌 상황을 고려한 전면적인 시간·공간 사용의 재구성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정보사회가 성숙하면 24시간 풀가동하는 도시(24Hour City)가 등장할 것이며 이에 적응하는 생활양식도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요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4시간 편의점은 시간·공간의 재구성에 적응하고 있는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공간은 실제로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공간에 관한 것으로, 이 물리적 공간은 실체로서 존재하며 대개는 객관적인 지표로 그 속성을 측정할 수 있다. 이러한 물리적 공간 외에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공간으로 심리적 공간과 사이버 스페이스를 들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이 실체적 공간이라면 심리적 공간은 관계에 근거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버지나 삼촌 또는 친구·이웃 등과 같이 심리적인 면에서 이들과의 관계가 가깝다거나 멀다고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런 관계의 원근에 따라 실제적인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위의 두 공간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닌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이 공간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는 결국 비트(bit)라 부르는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호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기가 쉽다.
이런 연유로 흔히 사이버 스페이스를 도구적 용도의 공간으로 생각하여 그저 정보를 찾거나 전달하는 정서가 없는 차가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렇게 무덤덤하게 정보를 찾거나 전달하는 와중에도 사이버 스페이스상에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사회적 접촉 공간으로서 사이버 스페이스와 관련해 「가상 공동체(Virtual Community)」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라인골드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WELL이라는 BBS를 운영하던 라인골드도 애초에는 사이버 스페이스를 기능적으로만 생각하였다.
라인골드는 어느날 그의 아기가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하자 여러 가지 방도를 모색하던 가운데 WELL에 아이의 증상을 설명하는 글을 올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접속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처치방안을 알려주고 같이 걱정을 해 주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라인골드가 느낀 점은 사이버 스페이스상에서도 사회적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런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비록 네트워크상에서 0과 1이란 비트 단위의 정보만 서로 오간다 하더라도 내용면에서 서로간에 이해와 감정 등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존재하기에 사이버 스페이스는 무인격적인 기능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생존에 가장 기초적인 음식을 먹는다거나 운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회적 접촉이 있기에 우리들은 사이버 스페이스상에 공동체도 형성할 수 있고 학교나 쇼핑몰도 운영할 수 있다. 또 더 나아가 사이버 도시·사이버 국가의 건설도 가능해지는 등 사이버 스페이스는 인간 활동이 가능한 마이크로코즘(소우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보화와 더불어 사이버 스페이스상에서 원격교육을 시행하고 있고, 또 기업들은 기업대로 공리적인 목표를 추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가지 우려되는 점은 사이버 스페이스를 지나치게 기술 위주로 생각하여 도구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성공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공부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쇼핑을 가는 것도 물건을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능적인 목표와 더불어 사회적인 관계도 형성하고 즐기자는 것이다.
따라서 제3의 공간인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기능과 함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 주고 이를 잘 유지할 수 있게 해야만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사이버 스페이스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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