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특집-ERP> 기업 살찌울 "경영 보약"

 멀티캡은 지난 7월에 현대전자에서 분리된 PC제조회사다. 이 회사는 독립법인으로 출범하기도 전인 지난 6월에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 기종을 선정하고 출범과 동시에 구축작업에 들어갔다.

 멀티캡은 최종 점검기간을 포함, 불과 두달 만에 시스템 구축을 완료하고 9월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최병진 멀티캡 사장은 『기업경쟁력을 갖추려면 하루라도 빨리 ERP를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서둘러 ERP를 구축했다』라고 말했다.

 멀티캡의 사례는 ERP에 대해 국내기업의 기대가 얼마나 높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ERP는 말 그대로 기업의 모든 경영자원(Enterprise Resource)을 통합, 관리하며 이를 바탕으로 경영계획을 수립하는 패키지소프트웨어(SW)다. 그런데 ERP는 단순히 컴퓨터를 통해 업무를 자동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업무과정 자체를 뜯어고친다는 점에서 일반 기업용 패키지SW와 사뭇 다르다.

 ERP는 업무 추진과정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불합리성을 찾아내 개선점을 도출한다. 따라서 정보화를 통해 경영합리화를 꾀하려는 모든 기업에 ERP는 「불가피한 선택」이 되고 있다.

 가트너그룹에서 최근 전세계 1만5천개 기업을 대상으로 내년도 정보화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 약 44%의 기업이 ERP에 우선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ERP가 기업정보화 투자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제통화기금(MF)체제가 들어선 이후 국내기업에 ERP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국내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과 경쟁하려면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추진해야 하는 입장이다. 여기에 ERP는 필수적인 도구로 등장했다.

 IMF체제 이후 많은 기업들이 뚜렷한 원칙도 없이 정리해고를 남발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ERP를 구축한 대부분의 기업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때문에 그다지 큰 마찰 없이 정리해고를 비롯한 경영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또 ERP는 정확한 데이터를 통해 산출한 수익성을 바탕으로 경영전략을 짤 수 있도록 돕는다. IMF 한파로 외형적인 성장보다 내실있는 경영으로 돌아선 기업에 ERP는 바로 「보약」에 비유된다.

 이밖에 ERP는 「발등에 떨어진 불」인 2000년 연도표기(Y2k) 문제를 해결한다. 또한 ERP를 구축한 기업은 결합재무제표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어 국내외에서 높아진 「기업경영의 투명성」 요구에 대응할 수 있다. 내년 회계연도부터 결합재무제표의 작성을 의무화하자 국내 대기업들은 최근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런데 ERP 회계시스템을 도입한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ERP 도입의 필요성은 이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기업의 관심은 ERP의 도입 자체보다는 오히려 ERP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에 맞춰져 있다. 올초까지만 해도 ERP 개념을 소개하는 세미나가 많았으나 최근 자취를 감추고 대신 ERP의 활용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부쩍 많아진 것에서도 이러한 인식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국내 ERP시장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할 전망이다. 국내 ERP시장은 애초 올해부터 활기를 띨 것으로 예상됐으나 IMF라는 돌발변수를 만나면서 위축됐다. 그런데 하반기들어 경영환경이 다소 호전되면서 ERP에 대한 투자분위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최해원 SAP코리아 사장은 『당장 계약에 이르지 않고 있으나 하반기들어 도입문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내년부터 ERP시장이 크게 활성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업계 관계자들은 내년도 국내 ERP시장은 올해보다 두배 이상 증가한 2천억원대에 이르고 특히 중소기업시장도 5백억원대의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ERP업체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영업조직을 업종별 솔루션에 맞게 개편하는가 하면 신제품 개발과 출시를 서두르고 있다.

 SAP코리아(대표 최해원)는 「SAP R/3」의 차기버전(4.5)을 비롯해 「고객밀착경영(CRM)」이라는 애칭의 각종 프런트 오피스 제품과 「SCOPE」라는 공급망관리 솔루션 등을 내년초에 잇달아 출시해 기선을 제압한다는 전략이다. 바안코리아(대표 강동관)는 최근 LG산전의 프로젝트 수주를 계기로 본격적인 수주영업을 전개키로 하고 공급망관리(SCM)를 비롯한 ERP 연동 모듈에 대한 보강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오라클(대표 강병제)은 인터넷 기반의 ERP시스템인 「오라클애플리케이션스 R11」을 최근 출시한 것을 시발로 통신·금융 등의 업종별 시장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JD에드워즈의 협력사인 두산정보통신사업부(대표 김윤일)는 이달말께 SCM과 고객관리 기능을 대폭 보강한 신제품 「원월드B 73.3」을 출시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나갈 방침이다.

 이밖에 한국SSA·한국QAD 등은 저마다 특화된 솔루션을 앞세워 영업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캐나다의 ERP업체인 TX베이스가 이달 국내시장에 진출했으며 미국의 대형 ERP업체인 피플소프트가 곧 한국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외국계 ERP업체들의 시장쟁탈전은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외국업체들의 파상적인 공세에 맞서 국내 ERP업체들도 최근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올초까지만 해도 국산 ERP제품은 외산제품에 비해 낮은 성능으로 인해 시장잠식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올들어 적극적인 연구개발로 국산제품은 외산제품에 견줄 만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최근 ERP를 도입하려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외산제품보다 저렴한 국산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고무돼 국내 ERP업체들은 내년부터 적극적인 수요발굴로 외산제품과 당당히 겨뤄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영림원(대표 권영범)은 내년 상반기중으로 외산제품과 같은 3단 구조의 컴포넌트형 신제품을 출시해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 시장을 적극 공략키로 했다. 한국하이네트(대표 김현봉)는 CKD정보기술을 합병하는 조직개편을 완료함에 따라 앞으로 본격적으로 ERP시장을 공략키로 하고 신제품 개발과 영업력 보강에 나섰다.

 삼성SDS(대표 남궁석)는 올해에만 30여개의 고객사를 확보한 것을 바탕으로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한 수주영업을 강화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 등지로 수출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한국기업전산원(대표 김길웅)은 최근 국내 중소기업용으로 특화한 ERP 신제품과 제품정보관리(PDM)와 같은 신기능을 추가한 대기업용 ERP를 출시하고 적극적인 영업을 전개하고 있다.

 지앤텍(대표 조영재)도 최근 개발한 윈도NT 기반의 ERP패키지인 「비전21」을 앞세워 시장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네바다테크·삼일회계법인·케미스·KTT경영컨설팅·코픽스 등도 저마다 특화된 업종에 영업력을 집중시켜 위상을 높여간다는 전략이다.

 영림원 권영범 원장은 『외산제품의 기능이 대체로 우수한 편이나 국내 실정에 다소 거리가 있어 국산제품을 찾는 기업이 뜻밖에 많다』면서 『국내업체들이 조금 더 제품력을 향상시킬 경우 외산제품과 충분히 경쟁할 만하다』고 말했다.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ERP업체마다 이처럼 적극적인 영업을 전개할 방침으로 있어 내년도 ERP시장은 사상 유례없는 시장쟁탈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또 ERP를 도입한 국내기업이 3백여개사를 넘으면서 ERP시스템을 근간으로 한 SCM·경영자정보시스템(EIS)·전자상거래(EC) 등의 확장 ERP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ERP가 기업정보시스템의 인프라로 자리잡아가면서 ERP와 연동한 데이터웨어하우스(DW)·전자문서관리시스템(EDMS)·그룹웨어 등의 SW시장도 활성화할 전망이다. 이는 또한 국내에 진출한 ERP업체와 기존 DW·EDMS·그룹웨어 업체간 합종연횡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낳고 있다.

 ERP업체들은 올해 ERP시장의 위축을 초래했던 기업 구조조정이 오히려 내년도 ERP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촉매구실을 할 것으로 한껏 기대하면서 저마다 매출목표를 상향 조정하면서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신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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