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빅딜" 외길 수순 밟고 있나

 『아무 것도 합의한 것이 없다. 2개 거대 기업을 합병하기 위한 사전 평가를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 없이 졸속으로 진행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더욱이 컨설팅업체가 고객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LG반도체)

 『대부분의 평가기준과 방법에 당사자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 평가기관인 아서 D 리틀(ADL)사 등 3자가 합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현대전자)

 『수험생에게 모든 문제를 미리 알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가진 노하우와 방법으로 경영주체 선정작업을 강행하겠다.』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반도체 부문 통합법인 경영주체 선정 작업을 위한 평가기준 협상이 양측의 의견 차이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가기관인 ADL사가 돌연 독자적으로 평가작업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표명, 사태를 더욱 복잡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ADL의 이같은 돌발적인 행동은 의뢰인(클라이언트)의 주문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컨설팅업체의 기본적인 자세를 크게 벗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모종의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특히 관련업계에서는 이번 파문이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의 「순자산가치 발언」 직후 불거져 나온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강 수석은 『빅딜로 신설되는 통합회사의 순자산이 플러스가 돼야 한다』고 말했고 채권단 협의체인 사업구조조정추진위원회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현대전자 측이 순자산 발언에 대해 반도체 업종이 아닌 전체 구조조정 대상업종에 대한 원칙적인 얘기라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고 이어 ADL 측이 평가작업 강행을 공식화하는 일련의 흐름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추정이다.

 이처럼 현대전자가 이 문제에 알레르기 현상을 보이는 것은 순자산 가치가 중요 평가기준으로 결정될 경우 책임경영주체 선정 경쟁에서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3자간 불협화음이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빅딜이 강행될 경우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재계 자율의 틀이 강조되고 있는 형편에서 추후 한 업체가 평가 결과와 과정에 불복하는 사태가 올 경우 이는 업계 뿐만 아니라 정부를 포함한 국가 전체의 신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업계의 한 관계자는 『빅딜을 전제로 모든 일을 밀어붙이기보다 반도체 업종의 구조조정을 위해 빅딜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 점검해보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나라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중대사를 치르면서 굳이 연말까지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에 얽매일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적지 않다. 더욱이 「을」의 입장에 서야 할 외국의 컨설팅업체가 의뢰인인 국내업체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갑」의 지위에서 군림하는 비상식적인 상황까지 감수해야 하느냐는 분노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최승철기자 scchoi@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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