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격동의 시대-GIONS의 연형 (7)
노태우(盧泰愚)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앞에서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인천전국체전 전산화를 수행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나온 성기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시스템공학센터(SERI)의 올림픽전산화 기초조사팀을 그날로 인천체전 전산화팀으로 개편했다. 팀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SERI 내에서 소장 다음의 서열 2위인 전산개발부장 김봉일(金鳳一·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을 팀장으로 내세웠다.
인천체전 전산화는 SERI가 과연 5년 앞으로 다가온 88서울올림픽 전산화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를 평가받게 되는 중요한 과업이자 절호의 기회였다. SERI가 올림픽전산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SERI로 대표되던 당시 한국 소프트웨어기술 수준을 전세계에 떨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83년 10월 인천체전을 6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1억원의 예산이 SERI에 떨어졌다. 청와대 지시에 의해 과기처의 특정연구비가 배정된 결과였다. 그나마 그것도 예산을 받고 보니 8천만원에 불과했다. 당시 과기처에서는 전자조정관이라는 국장급 직책이 있었는데 통상적으로 전자기술연구소(KIET, 8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로 합병)에서 파견된 인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KIET출신 전자조정관이 예산 1억원을 KIET측에 지급해 버린 데서 비롯됐다. 당시 정부는 최초로 시도되는 체전전산화를 「전자체전」이라는 명목으로 대국민 홍보를 하곤 했는데 담당조정관이 이를 비디오 모니터 따위의 전자장비 도입 정도로 지레 짐작하여 KIET측에 넘겨버린 것이었다.
성기수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때는 KIET가 비디오 모니터 등의 임대비용으로 이미 2천만원을 지불해 버린 뒤였다. 가까스로 8천만원을 되찾긴 했는데 한번 집행된 예산을 되돌릴 수 없어 결과적으로는 SERI가 KIET의 하청계약을 맺고서야 찾아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스포츠게임이나 올림픽 전산화에 대한 정부측의 시각이 어떤 것이었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인천체전은 경기 종목이 27개로 25개 종목 내외의 올림픽과 비슷했지만 세부종목(메달수)은 8백여개나 됐다. 2백63개의 세부종목을 치른 88서울올림픽의 3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체전전산화를 8천만원의 예산으로 그것도 6개월 만에 완료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소장인 성기수의 자신감만으로 SERI 연구원들을 독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기수는 김봉일을 불러 넌지시 8천만원으로도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의욕이라면 성기수보다 한술 더 뜨는 김봉일이었다. 김봉일은 88서울올림픽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된 것이며 인천체전은 그 파일럿시스템이 돼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사실 김봉일의 이같은 의욕과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88서울올림픽 전산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이같은 업무 스타일은 올림픽이 끝난 후 약간의 후유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산이 태부족인 상태였으므로 주전산기(호스트)를 따로 구입할 수는 없었다. 78년 말에 들여 왔던 「IBM 3032」와 83년 6월에 들여온 「사이버170-835」를 체전전산화용 호스트로 사용키로 했다. SERI가 서울 홍릉이라는 원격지에 있었으므로 데이터통신망을 통해 호스트의 컴퓨팅파워를 인천 숭의동의 인천공설운동장으로 끌어내는 방법이 동원됐다. 수십 명의 SERI 연구원들이 시스템 개발을 위해 숭의동 인근의 여관 한 채를 전세내다시피 하며 상주했다.
처음 시도된 프로젝트였던 데다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서였던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체전 개막일에 맞춰 7개의 시스템이 개발됐다. 27개 종목별 경기결과를 입력·처리하여 대회본부·프레스센터 등에 제공하는 경기결과처리시스템, 경기 일정별로 출전선수(팀) 명세를 작성하여 제공하는 스타트리스트작성시스템, 시도별·종목별 득점현황과 최종 집계표를 작성하는 채점집계시스템, 종목별 경기결과에 따라 차후 일정을 작성하는 일정표작성시스템, 시도별·경기종목별 참가자 명부를 작성하는 참가자명부작성시스템, 사전에 종목별 세계기록·한국기록 등과 참가자 신상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최고기록제공시스템과 참가자안내시스템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체전 개막일에 맞춰 이를 개발해낸 것만으로도 천우신조였다. 예산은 두번째 치더라도 심판들이나 경기운영요원들에게 시스템을 교육할 시간이 없었다. 개막일 아침부터 대혼선이 빚어졌다. 심판과 운영요원들이 경기경과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했다. 첫날의 경기결과는 전화를 이용해서 일일이 대회본부에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로 통보할 수 없는 기록은 사람이 오고갔다. 첫날부터 전산시스템의 운영이 삐끗거리자, 그날 한 석간신문은 「컴퓨터가 아니라 발퓨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둘쨋날부터 이상없이 진행하라는 노태우 위원장의 긴급지시가 날아왔고 그날 저녁 철야로 심판과 운영요원들에 대한 전산교육이 실시됐다.
놀랍게도 두번째 날부터 폐막일까지 나흘 동안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큰 잡음없이 경기결과가 즉시즉시 대회본부와 프레스센터로 통보됐다. 체전이 끝나고 노태우 위원장이 성기수를 불렀다. 노 위원장은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이 1백%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 최초의 「전자체전」 치고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려줬다. 이어 인천체전 시스템을 기반으로 84년 대구체전, 85년 강원체전, 86년 아시안게임, 87년 광주체전 등을 통해 기술과 경험을 쌓는다면 획기적인 시스템이 개발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노 위원장은 성기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매년 체전 때마다 시스템 향상을 위해 서울올림픽조직위 예산을 반영시켜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노 위원장의 약속은 사실상 SERI가 88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을 맡아 개발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SERI가 88서울올림픽 전산화를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인천체전 직후에 있었던 「올림픽전산화에 관한 국제워크숍」을 통해서였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주관한 이 워크숍에서 SERI측은 64년 도쿄, 76년 몬트리올, 80년 모스크바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담당자들로부터 독자적으로도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는 평가를 얻어낸 것이었다. 이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은 LA올림픽용 전산시스템인 SIJO를 도입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자체 개발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며 장점이 많다는 점을 집중 강조하고 나섰다. 이 워크숍은 SERI가 대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84년에 들어서면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측은 SIJO 도입이냐 자체 개발이냐를 놓고 더 이상 머뭇거릴 수만은 없게 됐다. 올림픽 개막까지는 4년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84년 초 시점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결판을 내야 할 입장이었다. 이때는 또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LA올림픽조직위원회측의 SIJO 도입 압력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공식입장은 84년 2월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날아왔다. 이곳에서 열렸던 한 스포츠 경기에 귀빈으로 초대됐던 노태우 위원장은 함께 초청받은 LA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과의 회합에서 올림픽전산시스템의 독자개발을 정식으로 통보한 것이었다.
이런 소식은 84년 제65회 대구전국체전용 전산시스템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SERI 연구원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SERI는 이 해 10월 인천체전 때의 경험을 토대로 대구체전용 전산시스템 GIONS(Game Information Online Network System)를 개발, 첫선을 보였다. 88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의 핵심 부문인 동명의 GIONS 원형이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구체전용 GIONS는 인천체전용 시스템에 비해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게임별 상세결과 처리기능이 새로 개발됐고 제1회∼제23회(84년)까지의 각종 올림픽 정보, 제6회(70년)∼제9회(82년)까지의 아시안게임 정보, 제55회(74년)∼제64회(83년)까지의 전국체전 정보 등을 비롯, 대구체전에 참가한 1만2천여명의 선수 신상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확장됐다.
또 IBM 3032 호스트에 연결된 각종 터미널 2백31대를 대구시내 32개 경기장, 프레스센터, 전국 13개 시도본부, 대구시 상황실 등에 분산 설치해 놓음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정보를 온라인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로소 올림픽전산시스템 방식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84년 6월 조직위는 SERI의 보고서를 토대로 88서울올림픽 전산화 기본계획을 확정하기에 이르렀고 SERI·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쌍용컴퓨터(현 쌍용정보통신)·한국전산(현 교보정보통신) 등 4개 기관(기업)을 전산시스템 개발기관으로 선정했다.
85년 12월 조직위는 KAIST에 대해 4개 기관(기업)을 대표하는 전산시스템 개발 주관기관으로 지정하였고 KAIST는 이를 부설연구소인 SERI에 위임하였다. 이런 조치에 따라 SERI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전산화 사업비 명목으로 1백50억원 한도내의 조직위 예산을 총괄적으로 위탁받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조직위는 이런 내용을 86년 1월 대내외에 공식 발표하였다. 81년 바덴바덴으로부터 서울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는 낭보가 있은 지 4년여 만의 일이었다.
【서현진기자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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