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를 이끄는 선도산업인 전자·정보통신산업의 성장가도에 급제동이 걸렸다.
매년 두자릿수씩 성장해 오던 전자·정보통신산업은 지난해말 거세게 몰아닥친 IMF태풍에 허약한 기반을 드러내며 비틀거리고 있다.
초긴축 재정과 고금리, 고환율이라는 금융위기 처방전이 내수 위축과 수출 침체를 유발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동반, 전자·정보통신업계를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다. 수요가 급속히 위축되면서 판매부진은 심화되고 여기에 가동률 급락 단계를 넘어 많은 생산설비가 유휴화하는 등 성장기반마저 유실되는 상황까지 치닫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판매부진과 신용경색으로 경영난을 견디다 못한 기업들이 잇따라 부도로 쓰러지면서 「원자재→부품→제품→유통」으로 이어지는 유·무형의 산업 네트워크마저 무너지고 일부는 공동화하는 현상까지 빚고 있다.
전자·정보통신산업이 비틀거리고 있는 것은 본사가 창간16주년을 맞아 전자·정보통신업계 최고경영자 2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IMF하의 전자·정보통신산업 환경 및 전망에 관한 설문조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IMF에 따른 체감정도를 최고 1백으로 할 때 평균 75.3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올 상반기 매출목표 달성률이 69.6%라는 것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매출이 부진한 이유에 대해 응답자의 81.7%가 「시장위축」을 꼽았다. 기술력도 떨어지는데다 환율이 불안정하고 금융지원까지 되지 않아 수출에 애로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 경기도 올해 못지 않게 어려울 것으로 경영자들은 내다봤다. 내수의 경우 유통, 소프트웨어, 컴퓨터 업종은 그나마 밝게 보지만 가전, 반도체 및 부품, 산업전자업종은 상대적으로 더 나빠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수출도 컴퓨터, 소프트웨어, 정보통신기기 업체들만 밝게 볼 뿐이다.
전자·정보통신업계는 이같은 IMF에 따른 어려움이 2000년 하반기까지 갈 것으로 보고 각종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전자·정보통신업계의 70.5%는 이미 지난 8월 중순 이전에 구조조정을 실시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또 앞으로 추가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나머지 업체들도 구조조정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력 조정이나 재배치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앞으로는 사업재조정에 주력할 계획이다.
올들어 7월까지 전자·정보통신제품의 내수가 25∼30%씩 줄 정도로 불황이다. 수출도 예외는 아니어서 7월까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7.7% 줄어들었다. 이같은 내수 및 수출부진은 전자·정보통신산업계의 가동률을 뚝 떨어뜨리고 있다.
현재 가전산업의 가동률은 65%, 일반전자부품산업은 50%에도 미달할 정도다. 공작기계산업 등 산업전자분야도 제조업 설비투자 감소로 가동률이 60%대로 급락했다. 그만큼 전자·정보통신업계는 총체적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아사지경에 있는 전자·정보통신업계를 더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것은 수입선 다변화품목 해제와 시장개방 등으로 물밀듯이 몰려오는 외국 업체들의 국내시장 진출이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업체들은 독특한 마케팅 기법에다 원화급등에 따른 환차익 등으로 가격경쟁력까지 높아지면서 시장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이같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국내 전자·정보통신업계는 「위기는 곧 기회」라는 인식으로 오히려 재도약의 발판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구조조정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하나같이 몸집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몸 전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꼬리를 잘라내는 도마뱀과 같이 생존을 위한 가지치기 작업을 하고 있다. 경쟁력 없는 사업은 물론 수익성 높은 사업까지 가리지 않을 정도다. 중소기업에의 사업이관은 물론 종업원 지주회사로 독립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늘어나는 것은 중소군단들이다.
대기업들은 사업정리와 동시에 주력관련사업의 경우 인수합병(M&A)도 추진하고 있다. 한마디로 몸집은 줄이면서도 핵심사업의 역량을 키워 전문회사로 재탄생하겠다는 각오다. 종전 문어발식 경영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사업정리에 따라 부족해진 분야는 아웃소싱으로 대체하겠다는 추세다. 생산과 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서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특히 그간 외국업체들의 국내 진출에 배타적이던 입장에서 벗어나 선진 경영과 기술 습득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외국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나 외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기업을 전문화한 만큼 기술급변에 대처하겠다는 뜻이다.
또 내수에 의존했던 그간의 관성에서 벗어나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내수조직은 분사 또는 축소하면서도 해외시장을 개척할 조직은 역량을 총결집시키고 있다.
현재 전자·정보통신업계가 추진하는 구조개편은 한마디로 「다각화보다는 전문화」 「외형보다는 내실」 「국내시장보다는 해외시장 개척」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내 전자·정보통신산업을 이끌어온 전자 3사가 맹주자리를 포기할 태세로 슬림화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중소기업에의 사업 이관을 통해 협력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가 하면 비주력사업의 경우 종업원을 주주로 하는 분사도 단행하고 있다. 「만들면 팔리던 시대는 갔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백화점식 제품생산에서 벗어나 주요 핵심제품만을 생산하는 전문화체제로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대표적인 내수의존형인 정보통신업계는 외국자본 유치나 매머드급 외국통신업체를 등에 업고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통신허브로 육성할 태세다. 갑작스런 외국사업자들의 국내 진출로 급박한 상황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세계 전자통신 시장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다는 각오다. 컴퓨터업계도 마찬가지다. 내수부진을 탓하기보다 해외 수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조직도 내수보다 해외영업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전자·정보통신산업의 풀뿌리산업인 부품산업계의 구조조정 몸부림도 세트업계 못지 않다. 특히 LG전자부품 등 종합부품업체들이 퇴출대상으로 포함되면서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트업체들의 공급주문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내수시장은 포기한 듯 해외시장개척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때문에 해외업체와의 제휴는 더욱 적극적이다.
전문가들은 전자·정보통신산업이 IMF위기를 벗어나 재도약하는 것은 기업들이 구조개편에 따른 방향성을 얼마나 빨리 설정하고 이른 시일내에 성공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정부의 시장 기능 활성화도 중요하지만 기업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분야를 이른 시일내에 선정해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사업을 집중화할 경우 경쟁력은 갖춰진다는 것이다.
문어발식 경영구조 개선과 주력사업 위주로 계열사간 합병을 촉진할 경우 소수 사업군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지만 재무구조는 건전해져 어떤 태풍이 몰아쳐도 견디어낼 수 있고 해외 유명업체와도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지적이다. 위기는 언제 어느 때나 있는 일이지만 이를 반전시키는 데에는 부단한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IMF 탈출 이후의 문제다. 전문가들은 IMF태풍과 산업계 구조조정으로 빚어지는 산업기반 유실로 인해 IMF 탈출 이후 성장기반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공부문 개혁과 금융개혁, 기업구조 개편 등의 일정과 강도를 조절, 산업현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차단해 실물경제가 돌아가게 하고 기업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김병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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