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0일, 미국 아틀란타에 위치한 세계 최대 게임전시회인 E3 전시장에서 있던 일이다. 한국PC게임개발사연합회(KOGA)를 통해 게임을 출품한 K씨. 그는 세계 최대의 게임쇼 E3 폐막 시간이 다가오자 내심 초조했다. 정부 지원금으로 공동부스를 설치하고 대기업에서 협찬받은 모니터로 국산게임 시연을 준비했던 며칠 전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지난 사흘 동안 상담 기회는 많았지만 정작 계약을 체결해 준 바이어는 없었다. KOGA 부스에 함께 출품한 나머지 5개사도 사정은 마찬가지. 그래도 K씨의 업체는 「의향서(Letter of Intent)」나 「기본합의서(Deal Meno)」를 주고 받은 바이어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종이 쪽지에 불과하지만 귀국 후 E-메일과 팩스로 상담을 계속하다 보면 계약이 이루어질 확률도 높기 때문. 그러나 기대가 워낙 컸던 만큼 허탈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중견유통사 H사의 한 간부도 애가 탔다. 부도위기설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무리를 해가며 독립부스를 마련해 준 탓에 출국 전부터 그에겐 심리적 부담이 컸다.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이번 쇼를 위해 국산게임 판권을 사들였던 H사의 노력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말부터 H사는 대기업 유통사보다 후한 조건으로 국산타이틀 총판권을 사들였던 것. 그러나 「판타랏사(소프트맥스)」「코룸2(자체개발)」를 비롯 국내 시장에서 내로라하는 게임을 갖고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회사는 결국 한 달 후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 게임업계에 충격을 던졌고, 당시 구두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도됐던 타이틀도 정식계약 체결이 불투명하게 됐다.
부스가 없어도 한국관 근처를 서성이며 바이어의 눈길을 끌어보자는 「무임승차 전략」으로 행사장을 찾았던 국산게임 개발업체 사장 L씨. 배짱 좋은 그였지만 몫 좋은 자리를 독차지한 외국 메이저사 게임관을 둘러보고 자신의 계획이 계산착오였음을 깨달았다. 관람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구경했던 외산 게임의 현란한 동영상과 3D 엔진에 그만 기가 질려 버린 것. L씨는 준비해간 노트북과 데모CD를 가방에서 꺼내보지도 못한 채 슬그머니 전시회장을 빠져 나가야 했다.
국산 게임의 현주소는 지난 5월 28일~30일 미국 아틀랜타에서 열린 E3(Electronic Entertainment Expo) 전시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PC게임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수출의 물꼬를 튼다는 꿈에 부풀었던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대체로 씁쓸한 기분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기업의 판권구매 담당자들이나 지난 해 가을 ECTS에서 참가업체들은 그래도 실망이 덜 했다. 국제 게임쇼가 초행길이었던 몇몇 국산게임 개발업체 사장들에겐 수출계약 실패보다 자신이 밤샘작업을 해가며 개발한 게임이 3류 취급을 받았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당장 수출의 물꼬를 틀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작품성만은 미국,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만큼 자괴감도 컸던 것.
하지만 국산게임이 푸대접을 받는 것은 E3, ECTS, 밀레야 등 어떤 게임쇼를 가나 비슷하다. 2∼3년 전만 해도 한국게임 6∼7편을 패키지로 묶어 번들이나 염가세일로 팔려는 업체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미니멈 개런티(Minimum Guarantee ; 최소 판매보장 수량)」 없는 단매(單買)나 판매실적에 따른 로열티 후불 계산을 요구하는 바이어도 있었다.
삼성전자의 해외판권 구매 담당자는 『요즘엔 계약조건이 많이 나아 졌지만 지금도 미 메이저사 바이어들은 대게 국산게임을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유럽의 경우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듯 먼저 가격부터 깍으려 든다』고 말한다. 업계에서 수출 실무를 가장 오래한 SKC의 한 관계자들도 『우리나라에 가장 호의적이라는 대만업체가 카피당 3달러, 미니멈 개런티 3천장의 야박한 조건을 제시하는 게 보통』이라고 털어 놓는다.
그나마 게임쇼에서 주고받은 간단한 의향서가 6~7페이지 분량의 정식계약서로 바뀌려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카피의 천국 홍콩이나 시장이 미처 열리지 않은 중국을 제외하면 아시아권에서 수출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대만과 싱카포르 정도. C사 등 한국게임을 단골로 취급하는 독일 유통라인을 타고 유럽에서 판매된 국산게임도 몇 타이틀 되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수출장벽이 가장 높다는 미국 게이머들에게 소개된 작품은 KRG소프트의 「드로이얀」 1편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3∼4편이 묶여 카나다업체로 수출된 게도 있었지만 판로가 북미지역 저가매장으로 제한됐다.
현재 외국에 가장 많이 팔려 나간 것으로 추정되는 국산 타이틀은 트릭소프트가 개발한 「주라기원시전」. 수출을 맡았던 SKC에 따르면 미니멈 개런티와 런링로열티를 합쳐 지금까지 6만 달러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5천장의 물량이 소화된 후 추가주문을 기다리는 「드로이얀」이 연내에 이 기록을 깰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 우리 돈 1억 이상의 수출대금을 회수한 게임은 없는 셈이다. 「조이블럭」 등 몇 타이틀이 더 있지만 순수 PC게임이라기 보다 게임형식을 가미한 유아교육용 CD롬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우리 게임이 해외 전시회에서 이런 3류 취급을 받을까.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상품성이 외산 히트작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불평을 할 처지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프랑스의 게임전문지 PC쥬(PC-JEUX) 최근호는 세계의 게임 리뷰란을 통해 시노조익사의 「카운터 블로우」에 평점 48점을 매겼다. 어느 정도 한국산 게임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다 하더라도 국내 잡지로부터 작품성 있는 리얼타임 전략시뮬레이션이 50점 이하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외국 게임의 10분의 1에도 못미치는 제작비를 들인 국산게임에 경쟁력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외국게임의 평균제작비는 1백만 달러(우리돈 13억), 얼마전 국내에 소개된 「파이널판타지7」같은 대작은 스퀘어사가 무려 2천만 달러를 쏟아 붓기도 했다. 그에 비해 국산게임 한 편을 만드는 데는 보통 1억, 많아야 4억 정도가 쓰인다. 그나마 인건비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제작비에 거품이 많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독창성이 모자란다는 것 또한 국산게임의 치명적인 약점. 서버 베이스의 머드 게임이 아니면서도 인터넷으로 세계 게이머들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디아블로」 「스타 크래프트」를 개발해낸 블리자드사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 기획 단계부터 미국이나 일본 게임의 야류작을 표방하거나, 시나리오를 그대로 배껴 오는 업체도 없지 않다.
RPG와 전략시뮬레이션 장르를 중심으로 전반적인 국산타이틀 수준이 향상되고는 있지만 상품 포장을 제대로 못한다는 게 또 문제다. 마치 촬영까진 잘 해놓고 편집과 녹음에서 망쳐버린 영화처럼 우수한 엔진을 가지고도 재미 없는 게임을 만들어 내는 것. 철저히 비즈니스 감각으로 무장된 해외 바이어라면 우수한 기술만 보고 게임을 구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로 유통을 맡아온 대기업과 소수정예부대로 팀을 이뤄 국산 타이틀을 만들어온 개발사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IMF 냉기류로 시장이 얼어붙어 요즘 국내 시장은 말 그대로 아사(餓死) 직전이다. 지난해 3백90억, 올해는 얼마나 줄어들지 모르는 내수시장만으로는 대기업도 개발사도 살아남기 힘들다. 동반자살을 하기 싫다면 2인 삼각의 힘겨운 노력으로 수출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기업은 마케팅 능력과 브랜드 파워, 지원 자금을 대고 개발사는 좀더 재미있는 게임, 팔리는 게임을 만들어야 수출길이 열린다. 남일소프트, 트릭, 드래곤 플라이 등 서드 파티와 SKC가 대만과 유럽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한 것이 현재로서는 모범답안이다.
물론 이같은 공조체제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대기업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 막차를 타고 게임시장에 진출했던 금강기획이 계열사에 판권을 떠넘기고 철수했다. 해외 판권을 소진시킨 후 사업을 포기한다는 소문에 시달려온 (주)쌍용과 LG소트프도 위기를 맞고 있다. 현업 부서원들이 수출에 적극적인 삼선전자도 계열사 삼성영상사업단과 통합 후 구조조정의 내압을 견뎌느라 주춤한 상태. 그러나 21세기 황금어장에 앞다투어 낚시대를 드리웠던 대기업이 수업료만 톡톡히 치르고 빠져나가기 보다는 이제부터라도 판권구매를 자제하고 서드 파티 업체를 확보해 국산타이틀 수출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실제로 파트너쉽을 구축할 때 대기업과 개발사가 한 발씩 양보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동안 대기업은 개발사들이 외국에 내다 팔기 힘든 게임을 들고와 턱도 없이 비싼 판권료를 요구한다며 무시해 왔던 게 사실이다. 개발사들이 대기업을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중소업체의 텃밭이던 PC게임 시장에 뛰어들어 외산타이틀 로열티를 눈덩이처럼 불러 놓고 한국게임 판권은 푼돈으로 사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던 것.
개발사들은 기술환상주의와 아집을 버리고 「철저하게 재미있는 게임」, 「해외시장에서 팔리는 게임」을 만들어야 하고, 대기업은 브랜드 파워와 마케팅 노하우, 투자로 제 역할을 해내야 한다. 대기업과 개발사의 연합전선만이 쓰러져 가는 국산게임 시장의 비상구를 열어 줄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선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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