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아시아 IT시장을 가다 (중)

일본편-틈새시장을 노려라

「가깝고도 먼 나라.」

이 짧은 문장으로 함축이 가능한 나라가 일본이다. 양국간 넘기 힘든 「벽」의 존재를 은연중에 내비친 이 말은 실체가 모호한 정서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는 상호간 우월감과 열등감이 혼재된 미묘한 역학관계가 가져다준 역사의 산물인 셈이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우리에게 이 벽의 실체는 좀더 분명해졌다. 단순히 정서적인 의미보다는 항상 한발 앞선 기술경쟁력을 지닌 일본에 대한 우리의 「한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됐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재도 이 벽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국내업계의 반응은 「정보기술(IT)시장만큼은 다르다」라는 쪽이 우세하다.(물론 일본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대다수 국내업계 관계자들은 IT산업만큼은 일본에서 배울 게 없다고 공언한다. NEC를 비롯한 자국 기종의 폐쇄형 시스템으로 일관해온 일본 IT산업은 이제 한계에 달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80년대말 거품경제가 극에 달할 무렵 미국의 상징인 록펠러재단 빌딩과 컬럼비아영화사 등을 인수하면서 「이제 서양이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거품이 빠르게 거치면서 일본의 경쟁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여기에다 최근의 심각한 엔화약세 현상까지 겹치자 일본은 더 이상 아시아의 맹주도 아니고 또 하나의 종이호랑이일 뿐이라는 성급한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일본도 자신들의 경쟁력이 무너진 최근의 상황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원인과 이에 따른 진단은 다소 엇갈린다. 무엇보다 최근의 상황이 「90년대 초 불황을 이유로 정보화 투자를 게을리한 결과」라는 일반적인 지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일본정보서비스산업협회(JISA) 오카다 조사부장은 『현재의 위기는 전후 50년간 누적된 문제가 표출된 것일 뿐 정보화 시스템의 경쟁력 차이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미국에 뒤져 있는 것은 고용 유동성 확보뿐이다. 물론 현재의 미국의 업무재구축(BPR)시스템은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몇십년 후에도 반드시 미국의 방식이 옳다고 보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그러나 민간기업의 진단은 조금 다르다. NEC 요시노리 에지리 제조부문 사업부장은 『일본의 IT시장은 분명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커스토머 중심의 개방형 시스템으로 전면적인 구조개혁 바람이 거세지고 있고 여기에다 민간업체 중심으로 아웃소싱 분위기가 가세해 IT산업의 새로운 기회시장이 열리고 있는 셈』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도 본격적인 IT산업의 구조조정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한창 열기가 불고 있는 아웃소싱 분위기는 일본상륙을 노리는 국내 IT업체들에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다. 하지만 일본에 파견된 KOTRA 정혁 과장은 일본은 결코 호락호락한 시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의 따르면 일본과 한국의 경쟁력 차이는 15배라고 지적한다.(이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대다수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만달러를 넘어선다. 반면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1만달러 수준에서 6천달러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인구는 일본이 1억3천명인 데 반해 4천5백만명 수준이다. 이에 따른 단순 곱하기 산술계산만도 15배의 차이가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계산법이 설득력이 있는가를 떠나 대다수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이런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지난 3월말 일본무역공사(JETRO)와 KOTRA가 주축이 돼 일본의 13개 업체가 국내 유력 소프트웨어업체 50개사를 방문했다. 일본 IT업체가 한국업체와 소프트웨어 수주상담을 위해 공식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한국업체를 다녀온 일본업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한국의 기술수준이 이 정도로 향상됐는지 몰랐다』였다고 한다. 물론 수주로 이어진 것은 아직 한건도 없다. 이 말 속에는 한국기술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와 함께 그동안 우리 제품에 대일본 시장홍보가 얼마나 취약했는지가 여실히 담겨 있다.

일본의 정보서비스산업은 92년부터 95년까지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하는 동안 성장이 계속 감소했으나 96년부터 폐쇄형 시스템 교체바람이 일면서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는 추세다. 지난 3월에 발표된 JISA 자료에 따르면 97년 일본의 IT시장 규모는 6백14억달러(8조엔) 정도로 세계 IT시장(4천1백억달러)의 15% 정도다. 이는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우리보다는 무려 13배나 많은 수준이다. 또 최근 2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8%로 비교적 활기를 띠고 있는 추세다. 최근에는 이에 따라 인력부족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KOTRA 정보기획처 원종성 과장은 『국내 몇몇 기업이 2000년 연도문제(Y2k) 인력을 일본에 송출하고 있는 것도 일본의 이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하며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이같은 단순인력 수출보다는 일본의 자체 기술제품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 시장 선점효과가 큰 푸시기술이나 인터넷 네트워크 게임분야가 유망하다고 조언한다.

JISA 오카다 조사부장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네트워크(NW) 중심의 신국가 정보화 추진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부처별로 전년보다 1.2% 증가한 3백34억엔 예산을 배정해 전자상거래/광속거래(EC/CALS) 등 주요 분야를 중점 추진하고 하고 있는데 이외에도 민간자금을 공공 인프라 구축으로 유도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힌다. 한마디로 IT산업을 육성해 사회 전반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얘기다.

NTT데이터 요네다 국제부장도 『최근들어 유통서비스 중심으로 아웃소싱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클라이언트서버시스템 도입으로 인력 재배치가 불가피해진데다 가격대비 고객서비스질 향상에도 아웃소싱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며 아웃소싱이 건설, 유통, 제조, 금융 분야로 빠르게 번지고 있어 IT산업의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KOTRA 원 과장은 『일본이 금융, 유통 분야를 중심으로 개방형 시스템으로 전환해나가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 기회를 가져다 주겠지만 뿌리깊은 폐쇄성을 불식시키 위해서는 많은 정지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일본 중소기업과의 협력이나 산, 학, 연 프로젝트 참여, 일본의 SSCT같은 소프트웨어테스트 전문기관의 이용, 전시회 및 정보매체를 통한 우리 제품 및 기술의 적극적인 홍보 등의 해법을 제시한다.

일본의 IT시장은 그동안 긴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개방형 시스템으로의 전환과 그동안 IT투자 축소로 인한 전문인력의 부족현상 등은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회를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기술과 자본 등 모든 객관적인 전력에서 달리는 우리 업체들이 일본 특유의 폐쇄성을 뚫고 전면적으로 상륙하기에는 분명 어렵다.

이보다는 우선 경쟁력이 있는 패키지상품의 도전이 가능하다고 일본업계는 조언한다. 이제 막 일본시장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한 핸디소프트, 교보정보통신, 삼성SDS 등의 성공사례도 무엇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을 앞세운 니치마켓 공략이 주효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 료비시스템의 케키 아라이 동경지사장도 『삼성SDS의 유니PACS시스템을 일본의 대형 미쓰이병원에 시범설치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설명하며 한국 시스템통합(SI)업체들의 일본진출은 턴키 수주보다는 상품진출에 이은 현지업체와의 협력모색 등의 순서를 밟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경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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