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전자부품의 대명사 콘덴서.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전자제품을 뜯어보면 제품특성에 따라 형태 및 크기는 다르지만 콘덴서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전자제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전기, 전자분야에서 광범위한 활용도를 지닌 콘덴서는 유전체로 어떤 물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크게 알루미늄 전해콘덴서, 탄탈룸콘덴서, 세라믹콘덴서, 필름콘덴서 등으로 분류되며 대다수 국내 업체들은 이 중 한 품목을 집중적으로 생산, 전문업체로 성장해 왔다.
70년대 이후 전자산업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국내 콘덴서산업은 양적, 질적인 면에서 급속한 성장가도를 달려왔다. 국내업체들은 초기에는 일본, 유럽 등 선진국 업체들과의 합작 및 제휴형태를 통해 기술을 이전 받아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국내업체들은 자신들에게 기술을 이전한 업체들과 국내외 시장을 두고 어깨를 겨루며 본격 경쟁하는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 수십년간 축적된 자체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품 개발은 물론 생산장비 및 원재료까지 스스로 생산하는 업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콘덴서 산업은 급격한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칩타입 콘덴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콘덴서가 획기적인 소재의 개발이나 생산방식의 변화에 따른 생산패러다임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은 채 콘덴서 제조기술이 점점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참여업체 수가 증대되면서 제품공급가는 계속 하락하고 동종업체들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에서의 경쟁과 함께 해외 후발업체들의 추격도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및 동남아지역 정부들이 값싼 임금을 장점으로 적극적으로 해외자본을 유인하거나 정부주도의 산업발전을 추진하면서 자국 내에 콘덴서공장을 대거 설립했다. 이에 따라 범용제품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국내외시장에서 국내업체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또한 전자제품의 경박단소화와 이동통신의 발달에 따른 고주파 제품 등에 주력 채택, 세계적으로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칩 제품 및 대용량 고신뢰성 제품 등 고부가가치를 보장하는 첨단분야에서는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 및 생산설비 증설에도 불구하고 선진업체와의 기술격차를 완전히 좁히지는 못한 실정이다.
결국 지금까지 여타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우수한 인적자원과 발달된 사회간접자본을 바탕으로 뛰어난 조립, 임가공기술 및 높은 생산성을 강점으로 발달해온 한국 콘덴서산업은 선진업체와 후발주자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신만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미래시장을 선도할 제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칩제품의 경우 국내는 기술개발과 설비투자에 들어가는 엄청난 자금부담 탓에 대기업 계열사와 전문중견기업만이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칩콘덴서인 적층세라믹콘덴서(MLCC)의 경우 가장 먼저 이 시장에 진출했던 LG전자부품이 올해 초 사업을 포기하고 월 5천만개의 생산설비를 모두 삼성전기에 매각, 현재는 삼성전기와 삼화콘덴서공업만이 생산하고 있다. 현재 월 2백10억개로 추정되는 세계시장에서 삼성전기는 MLCC 부문에 대한 집중투자를 통해 올해 3월 월간 20억개 생산을 돌파, 국내시장에서 독주태세를 보이고 있고 삼화콘덴서는 월간 1억7천만개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대용량과 고압특성을 장점으로 한 칩전해콘덴서는 세계시장이 월 3억개 규모를 형성하고 있는데 삼영전자공업이 월 2천5백만개의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고 삼화전기와 삼성전기가 각각 2백만개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고주파특성과 온도변화에 따른 안정성을 장점으로 이동통신기기를 중심으로 세계수요가 월 9억개로 추정되는 칩탄탄룸콘덴서의 경우 삼성전기가 월 6천만개, 대우전자부품이 월 3천만개를 생산중이다.
제품별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국내업체들의 칩제품 생산량은 세계시장에서 약 10%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칩제품 생산업체들은 시장을 선점한 선진업체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고 있다. 선발업체들은 시장지배력, 신제품 개발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국내업체들을 죄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80년대 말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나타난 것처럼 감가상각이 끝난 품목에 대해 생산원가 수준의 저가정책을 구사, 국내업체들의 시장확대를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미래시장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판단 아래 국내 업체들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맹추격전을 벌여 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불어닥친 심각한 자금난과 세트감산에 따른 공급량 감소는 대규모 신규투자를 주춤하게 만들고 있다. 올해 대부분의 국내업체들은 칩콘덴서 분야에 대해 신규투자를 통한 증산이나 신제품 개발보다는 기존 생산품에 대한 원가절감, 생산성향상 등을 통한 경쟁력 강화에 집중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칩제품 시장에서 국내업체들의 입지 확대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동남아에 진출한 해외 업체들의 도전과 함께 국내 세트업체들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해외생산전략과 맞물려 국내 콘덴서업체들은 경쟁력강화와 세트업체에 대한 납기대응력 확보를 목적으로 90년대 초반부터 해외에 생산거점을 마련하기 시작, 96년과 97년에 해외진출은 절정에 달했다.
지금까지 약 20여개의 업체들이 중국지역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지로 생산기지를 이원화시키거나 일부업체의 경우 생산설비를 모두 해외로 이전했다. 이들 업체들은 현지공장에서 주로 인건비 부담이 높은 저가의 범용제품이나 현지에 진출한 국내 세트업체들에 채택되는 사양의 제품들을 위주로 생산해왔다.
그러나 지난해말 갑작스럽게 다가온 외환위기는 대다수 해외진출 업체들에게 혹독한 시련으로 다가왔다. 급격한 원화가치 절하는 대부분 외자를 동원, 해외진출자금을 확보한 업체들에게 상환부채 및 이자를 두 배로 증대시켰다. 또한 생산에 필요한 원, 부자재 및 설비를 국내에서 조달해 해외로 가져간데 따른 생산비 상승과 국내로 재반입하던 해외생산품의 가격경쟁력 상실은 저렴한 인건비라는 장점을 모두 상쇄시켜 버리고도 남았다. 여기에 더해 세트업체들이 국내로 재반입해오던 물량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제품들에 대해 해외생산을 크게 감축, 해외공장 가동률이 50~70% 선으로 줄어든 콘덴서업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처럼 첨단제품 개발투자의 위축과 해외생산의 채산성 악화에 따라 콘덴서업계의 위기 돌파를 위한 노력은 모두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더군다나 올해 들어 경기불안에 따라 콘덴서의 주요 수요처인 세트업체들이 종합적인 생산계획을 마련하지 못한데다 내수감소에 따른 공급물량 감소로 지난달부터 콘덴서 국내 생산량은 전체적으로 20~30%의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환율상승에 따라 강화된 수출경쟁력을 무기로 지난 연말부터 업체들은 본격적인 수출확대 전략을 마련, 수출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전자부품의 특성상 세트업체들의 부품교체가 쉽지 않고 제품 신뢰성 테스트에만 6개월 이상이 걸려 올해 안에 본격적인 수출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많은 업체들이 수출 경험이 부족해 해당국가마다 상이한 규격획득 및 관행 등 수출 절차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업체들마다 이처럼 수출확대를 추진하는 동기가 품질 및 가격 면에서 해외업체들과의 경쟁력을 확보한데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원화가치 절하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점은 환율이 다시 떨어진다면 수출길이 다시 막혀버리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이처럼 총제적인 위기가 닥쳐오면서 업계 내부에서는 지금까지의 관행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의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전체 생산이 계속 증가세를 유지하던 상황에서는 동종업계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해당 기업의 발전과 함께 전체 산업의 발전을 추동해낼 수 있었지만 안팎의 위기에 직면한 현재 상황에서는 공생의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콘덴서 사양별로 적게는 3~4개 업체에서 많게는 수십개 업체에 이르기까지 동종업체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세트업체들의 공개경쟁 입찰제 도입과 전체 원가절감 방안에 따라 부품공급가는 원화절하에 따른 원재료비 상승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락하는데도 공급과잉에 따른 제살 깎아먹기 식의 경쟁이 만연, 업계 채산성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경쟁이 지속될 경우 결국 몇몇 업체들은 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쓰러질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이 일부 시장에서 사라진다 해도 이는 다른 업체들에게 결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쟁의 심화속에 하락한 공급가의 정상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며 그 동안의 채산성 악화는 살아남은 업체들의 경영상태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방침에 따라 부도난 업체를 막강한 자금력을 지닌 해외업체가 인수, 공격적인 영업전략을 구사할 경우 상황은 더욱 급변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동종업체 사이에 개발, 생산, 영업 등 각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 업체가 해당 사업을 전담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 각 분야에 집중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국내업체들별로 전문화를 통해 개발력을 높이고 생산성 및 영업력을 확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들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문제여서 선뜻 먼저 나서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상호대립적으로 바라보는 「모 아니면 도」식의 관행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상호보완적인 상태로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대승적인 관점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지금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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